54) 친애하는 친구에게

셸 위 댄스-인생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by 장하늘

54화




유칼립투스 (꽃말: 추억, 기억, 재생, 신생)



친애하는 친구에게


나의 20 초반에 너를 빠트릴 수는 없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반 반장 김이 남자 사람 친구를 소개해 줬다. 김은 우연히 알게 된 친구와 편지를 서로 주고받고 있었다. 둘은 서로 얼굴은 본 상태였고 그 친구는 강원도에서 학교를 다녀서 둘은 편지로 연락했다. 김은 나를 소개해 줬고 그 친구는 이 군을 소개해 줬다. 김과 편지를 하는 친구가 빠른 77년생이라서 한 학년이 우리보다 높아 이 군은 고2였다. 서로 같은 반 친구를 소개해 줬기 때문에 이 군은 76년생이었다. 한살이 많았지만 자연스레 친구가 됐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우린 손 편지를 했다. 그 시절은 편지가 제일 좋은 연락 방법이었다. 전화기는 물론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와 부천까지는 전화 요금이 너무 비싸서 아주 가끔만 허용됐고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 할 뿐 길게 할 수 없었다.


먼저 이 군이 편지를 썼고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에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멀리 있지만 얼굴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사진 속 풍경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가득했고 여전히 눈이 오는지 눈송이가 번져 있었다. 허리보다 높이 쌓인 눈 속에는 다소 호리호리해 보이는 청소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진은 바닷가 해변이 펼쳐져 있는 사진 안에서 짧은 머리의 아이가 개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원도의 멋이 가득한 사진이었다. 모래사장도 처음 봤고 그렇게 많은 눈을 본 적이 없어서 사진 속 풍경은 딴 세상 같았다. 나도 사진책자를 오랫동안 살폈고 괜찮게 나온 사진을 보냈다. 서로 사진으로만 본 상태에서 편지를 썼다.


사춘기 때라 생각이 흩어지고 모아 지고를 반복할 때였다. 주저리주저리 못 할 이야기 없이 편지에 떠들어 댔다. 우린 초창기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 편지를 썼다. 서로 답장 릴레이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일 년 정도 지나자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 편지는 질풍노도 십 대들의 해우소가 되었다. 편지지도 바뀌게 되었다. 처음엔 일반 편지지에 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잡히는 모든 것이 편지지가 됐다. 잡지를 찢어서 편지를 쓰기도 했다. 예쁜 그림이 있으면 종이에 오려 편지지를 만들었다. 예쁜 꽃, 나뭇잎 등도 모두 편지지를 꾸미는 좋은 소품이 됐다. 색깔이 다른 펜으로 멋을 내기도 했다. 형편없는 그림이지만 정성을 다해 그려 넣고 머릿속 생각들을 편지지에 쏟아 냈다. 밋밋한 종이에는 시를 써서 모양을 내기도 했다. 유명한 시를 적기도 했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자작 시를 쓰기도 했다. 깨알 같은 글씨나 암호를 넣어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이 군이 알아볼 수 나 있을까? 상상하며 편지지를 채웠다.


동성친구만 있었던 나에게 이성인 친구는 뭔가 다른 존재였다. 같은 반 친구들과 하지 못하는 생각들을 편지지에 적기도 했다. 집 전화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공중전화를 이용해서 통화하기도 했다. 당시엔 거리에 따라 전화 요금이 차등되어 청구됐다. 강원도는 멀었고 그 거리 때문에 동전이 많이 필요했다. 가끔 길게 통화하고 싶을 때는 동전을 한 움큼 가지고 공중전화기로 갔다. 동전에 여유가 있어도 문제가 있었다. 동네에 몇 개 안 되는 공중전화기에서 오래 통화하는 건 눈치 보이는 일이었다. 편하게 통화하려면 늦은 밤에 가는 게 제일 좋았다. 아무래도 그런 수고는 이 군이 맡아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였지만 이성이었기 때문에 그 생경함이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심과 나, 미영이, 미영이 쌍둥이 동생 넷이 강원도에 갔다. 심의 중학교 때 친구 선 x이도 강원도로 전학을 갔었다. 선 x는 잘 놀고 활달한 성격이었고 심은 그 친구와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다. 우리 넷은 선 x도 보고 이군도 보기 위해 처음으로 강원도 속초행 고속버스를 탔다. 속초 터미널로 선 x가 마중 나와 있었다. 선 x가 속초를 구경시켜 줬고 선 x네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선 x도 포함해서 열여덟 딸기 같은?(ㅋㅋㅋ) 여고생 다섯 명이 이 군의 집으로 갔다. 이 군의 집은 고성이었다. 버스가 하루에 두 대만 다녀서 시간을 맞춰서 가야 했다. 이군 부모님은 우리를 반겨줬다. 텃밭에서 따온 야채로 반찬을 만들어 주셨는데 꿀맛이었다.


거의 매일 편지를 하고 자주 통화했던 이 군과의 상봉은 무의식 속을 헤매듯, 방금 꾼 꿈을 생각해 낼 때처럼 현실감각이 없이 몽환적이었다. 처음으로 대면한 서로의 표정에는 반가움과 어색함이 공존했다. 사진으로 봤던 것과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이군도 그랬을 것이다. 이 군과 서로 처음 얼굴을 보자 이질적이고 낯섦이 마냥 이상했다. 목소리는 익숙해서 내 친구 이 군이 맞는데 얼굴은 영~ 어색해서 '누구시죠?' 하는 분위기였다. 서로 얼굴을 돌려서 이야기하자며 깔깔거렸다. 여자 다섯 명의 잘 곳을 마련해 준다며 이 군의 집 옥상에 텐트가 쳐졌다. 강원도 고성군의 밤하늘은 별들로 가득 빛나고 있었다. 이야기꽃은 한참 동안 이어졌고 밤은 깊어 갔다.


내가 고3일 때 이 군은 대학생이 됐다. 대학에서 여자친구가 생겼고 여친과 놀 때는 잠시 편지가 뜸해지기도 했다. 여자친구와 잘 지내는 방법 등 싸움이 있을 때 나에게 조언을 얻기도 했다. 나에게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 나도 조언을 구했다. 이 군이 군대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우린 자주 편지를 나눴다. 23살 때 마음이 너무 힘들었던 어느 날 한 번 더 혼자서 이 군의 집에 갔다. 그날 이 군은 고성의 숨은 보석 같은 곳들을 데려가 주었다. 아버지, 엄마, 회사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위로받는 시간이었다.


기분이 좋은 탓에 약한 술을 많이 마셨다. 필름이 끊겼고 실수가 있었다. 토를 여러 번 했고 다음날 뜨문뜨문 기억이 났다. 그러나 화제로 내놓고 이야기하진 않았다. 술기운에 생긴 사고는 조용히 지나가는 게 상책인 것 같았다. 다음날 어머니가 밭에서 딴 오이로 만든 오이냉국을 주셨는데 술이 깨고 숙취가 가라앉았다. 텃밭에서 호박과 양파를 따서 호박전도 뚝딱 만들어 주셨다. 너무 맛있었다. 이 군은 나를 터미널까지 데려다줬고 서로 덕담하며 우린 헤어졌다. 그 후 일상으로 돌아왔고 나는 방송대에 입학했다. 바쁜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무려 5년 넘게 서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친구 이 군, 가끔 난 나의 펜팔 친구를 떠올린다. 주소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인흥 1리.' 신기한 건 주소가 이렇게 하면 끝이었다. 우체부 아저씨는 모든 가정에 아이들 이름까지도 다 알고 계셨던 듯하다.


"내 생에 유일했던 펜팔 친구 이 군아~. 잘 지내고 있지? 늘 그대의 행복을 기원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건 아마 나 일 거야. 보고 싶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