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한바탕 폭풍이 몰아쳐도 회사에 출근하면 일상을 보냈다. 내가 당시 할 수 있었던 건 회사 생활을 잘하는 것 밖에는 없기도 했다. 울적한 마음이 들 땐 음악을 더 자주 들었다. 당시엔 신나는 멜로디의 인기곡들이 많았다. IMF로 뉴스에는 간간이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임창정의 <늑대와 함께 춤을>을 듣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들렸던 가사가 거슬렸다. 한두 번 들었던 노래가 아니었는데 걸려버린 가사 때문에 결국 노래를 껐다. 속이 메스꺼워졌다. 속이 안 좋다는 생각이 들자 이내 속에서 울꺽~ 비위가 상하며 화장실로 뛰어갔다. 토를 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괜찮은 남자로 보여야 할 텐데~'라는 대사가 작은언니 일을 연상시켰고 비위를 건드렸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사무실로 와서 할 일을 했다.
안양지점이 첫 발령지였던 것은 결국 굉장히 복 받은 일이었다. 그리고 합동 대리점에서 총무로 일하면서 많은 일을 처리한 게 도움이 됐다. 대형점포라서 할 일이 많았다.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효율을 스스로 고안했다. 많은 업무량을 처리하기 위해 순서를 정하고 규칙을 정했던 일들이 모두 도움이 됐다. 부천으로 와서 똑같이 일을 했는데도 모든 일이 금방 처리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독보적으로 일을 잘하는 총무로 인정받게 되었다. 영업소의 여라 가지 평가 지표는 완벽할 수 없다는 게 당연한 때였다. 완벽하지 않은 게 당연한 지표들이 100%, 혹은 0%를 달성했다. 나는 전건 전수 조사 및 전건 해피콜을 진행했다. 그러자 이래 적인 수치를 달성한 것이다. 지점에서 어떻게 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나는 전건 해피콜을 고객에게 일일이 진행했다고 말했다. 나 때문에 총무들 일이 늘어나게 될 판이었다. 방법을 알았다고 모든 점포에서 따라 하기에는 환경에 따라 무리가 있었다. 총무 업무 자체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부천지점 한마음 영업소에서 일하면서 총무를 평가하는 지표를 두루두루 챙겼다. 그런데도 일하는데 짬이 났다. 첫 근무지에서는 일할 때 짬이 나는 경우는 없었다. 그게 습관이 돼서 나는 짬이 나면 다른 거라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살폈다. 그러다가 회의 시간에 나눠준 효율 지표가 생각이 났다. 총무의 평가 대상은 아니지만 영업소 소장님 평가와 지점 평가에 들어가는 지표였다. 보험이 실효가 되면 보험료 모수가 줄게 된다. 실효가 안 되도록 관리하라는 내용의 지표였다. 그래서 실효가 안 되도록 설계사님들께 관리를 독려시켰다. 조금 개선이 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큰 효과는 거둘 수 없었다.
어떤 게 좋을까 고민을 해 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실효 건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보험계약 실효는 고객이 돈을 2개월 치를 안 냈을 경우에 발생했다. 고객이 사정이 안 좋아져서 돈이 없어서 실효를 시키는 경우들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자동이체 통장관리를 못해서 실수로 실효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차츰 실효 안내차 고객들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감사 인사와 혹시라도 불편사항이 있는지에 대한 안내콜로 전화드렸다. 그리고 현재 실효가 되어있으니 혜택을 못 발을 수 있다는 안내를 드렸다. 의외로 많은 분들이 부활 의사를 밝혔다. 그래서 보험계약 부활을 하게 되었다. 실효가 안되게 관리하는 것보다 부활을 하니 최소 3개월치의 보험료가 수납이 되었다. 이미 모수가 빠진 것을 정상화로 시켜놓으니 수치가 몇 배로 좋아지는 효과가 생겼다.
한 달이 지나자 꽤 많은 부활 보험료가 수납됐고 보험이 정상화가 됐다. 총무의 평가항목에는 부활이 없었다. 그러나 소장님, 지점장님 평가에는 부활도 평가 대상이었던 것 같다. 놀랍게 개선된 사항을 발견하고 지점에 계신 최고 책임자인 지점장님이 전화를 주셨다. 어떻게 개선됐는지 물으셨고 내가 한 내용을 말씀드렸다. 이후 나의 노고를 독려하고 칭찬하기 위해 지점장님은 부활 금액에 따른 시책을 내걸었다. 나는 시책이 시행되고 매달 꼬박꼬박 시상을 탔다. 시책은 현금은 아니었으나 백화점 상품권이라서 많은 도움이 됐다. 최소 10만 원에서 많을 때는 20만 원의 상품권이 시책이었다. 당시엔 아주 큰 금액이었고 월급에 2~30퍼센트에 상당하는 액수였다. 매달 부활 시책을 타는 총무로 나는 항상 1등이었다. 이후 지점 내에서 <부활 총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첫 직장, 첫 발령지에서 배운 게 참 많았다. 직장 생활이다 보니 일 처리 방식을 배운 건 물론이다. 내가 처음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들을 생각해 봤다. 1. 회사가 보험회사였으니 보험에 대해 알게 되었다. 2. 영업소 내에서 운영비를 관리했기 때문에 작은 사무실이지만 살림살이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3. 보험사도 제2금융권이라서 돈 관리에 대해 배웠다. 4. 리스크에 대한 개념이 생겼다. 5. 전산에 떠 있는 숫자 하나하나 맞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게 되었다. 6.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사람공부를 할 수 있었다. 7. 영업소는 실적을 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성과를 채우고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배웠다. 8. 단순한 서류 같지만 영수증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9. 사람들을 동기부여 시키고 동참시켜서 한 방향으로 협동하도록 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보고 실천해 봤다. 10. 일하는 장소에 환경,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11.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12.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마음을 다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13. 솔직함과 성실함에 대한 가치를 알았다. 14. 외모를 단정히 하고 바른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15. 싸인이라는 것이 그냥 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책임을 내가 지겠다는 의미라는 걸 배웠다. 이 밖에도 너무 많은 것들을 배웠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잘 살게 되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98년,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인 윌 헌팅은 대학교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다. 그는 천재적인 기억력과 수리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학대와 불우한 성장과정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 윌은 수학뿐 아니라 법률, 예술, 철학 등 다방면으로 뛰어난 지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번 본 책은 머릿속에 사진처럼 기억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 있다. MIT 공대 교수인 제랄드 램보 교수는 푸리에 이론을 칠판에 적어두고 학기말까지 푼다면 자신의 수제자로 부와 명예, 그리고 그 성과가 기록되고 유명해질 거라고 한다. 청소 일을 하던 윌이 그걸 아무도 모르게 풀어버린다. 이후 내용 생략. 윌의 인생 앞에 나타난 교수님이라는 인연이 있었듯이 나에게도 살면서 그때마다 은인이 있었다.
영화 <굿 윌 헌팅>을 본 건 배우 맷 데이먼을 보기 위해 본건 아니었다. 로빈 윌리엄스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가 나온 영화라서 챙겨봤다. 로빈 윌리엄스는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준 배우다. 배우 개인의 성향이나 가치관은 전혀 알지 못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그곳에서 나온 캐릭터가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내가 가장 많은 횟수를 본 영화였다. 고등학생일 때 비디오로 보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이후 몇 번 더 영화를 반복해서 봤다. 나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늘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이 책상 위로 올라가서 오~ 캡틴! 마이 캡틴! 을 외치면 중얼거리며 함께 합창했다. 영화를 반복해서 볼 때마다 왜 그렇게 감동했을까를 생각해 봤다.
나는 환경, 혹은 타인에 의해 강요되는 관성적인 선택이 아닌 자유의지로 내 삶을 잘 살아내고 싶었던 것 같다. 22살에 나는 일하는 직장에서 부활 여사원, 부활 총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 별칭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부활하는 자>가 되기 위해 이후에도 여러 가지 도전을 하며, 이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때때마다 나에게 은인이 되어준 분들께 감사하다. 서로 연락을 못하고 살더라도 그 인연에 감사하며 늘 그들의 행복을 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