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4월, 집이 발칵 뒤집혔다. 작은언니는 배가 꽤 불러 있었다. 두 달 정도 후에 조카가 태어날 예정이었다. 작은 언니가 며칠 동안 소리를 내며 울었다. 엄청나게 화를 내고 크게 소리를 치기도 했다. 며칠을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악에 받친 듯 절규하는 모습은 그저 애처로웠다. 그러다가 쓰러져 잠이 들곤 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후 이내 체념한 듯 보였다. 작은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심성이 착했다.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작은 언니가 화나 있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게 되었다. 예민해진 작은 언니에게 나는 해줄 말이 없었다. 심신이 불안해진 작은 언니가 잘 먹지도 못하자 살이 빠졌다. 정기 검진을 위해 산부인과를 찾았다. 이대로 만삭이 돼서 아이를 출산할 경우 아이가 미숙아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며칠을 울던 작은 언니가 마음을 잡았는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잘 먹어서 아이를 잘 낳겠다는 것만 생각하는 듯 보였다.
작은언니는 우리 집에서 1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고 딸로는 두 번째였다. 그리고 그 후 동생인 내가 태어났다. 아들은 귀한 대접을 받았지만 딸은 찬밥 신세였다. 첫째 딸은 살림 밑천이고 둘째는 귀한 아들이었다. 아들 하나로는 부족한, 대가 귀한 종갓집에 아들이 더 필요했다. 세 번째로 아이를 낳았는데 실망스럽게도 딸이었다. 이후 3년 만에 또 아이를 낳았는데 또 딸이었다. 막내도 딸이지만 집에서 천대까지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둘째 딸은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둘째 딸을 살뜰히 챙기는 사람은 없었다. 예쁨 받기 위해 어릴 때부터 노력해야 했다. 눈치껏 행동했고 부모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착한 딸이 되었다. 부모님 말씀을 거역한 일이 없고 유순한 성격으로 자랐다.
1980년, 단칸방에 딸려있는 부엌은 얇은 시멘트 벽으로 지어졌는지 허술했다. 화장실은 푸세식 화장실로 집 밖으로 나가면 여덟 세대가 사용하는 공동화장실이 있었다. 그런데 그 화장실의 위치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집 앞이었다. 푸세식 화장실은 똥 푸는 날이 되어야 그 깊이가 아득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물들이 가득 차며 높이가 올라왔다. 똥오줌이 가까워질수록 그때부터 긴장하게 됐다. 구더기들이 스멀스멀 화장실 위로 올라와서 볼일을 볼 때 수많은, 그놈의 징그러운 것들을 봐야 했다. 어린 나이에 꿈틀거리는 구더기는 공포 그 자체였다. 7살, 4살짜리 아이에게 화장실에 간다는 건 공포와 마주하는 것이었기에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날씨가 좋으면 다행이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구더기들이 화장실을 탈출해서 범람하듯 기어 나왔다. 그 무서운 놈들은 비가 오면 집안으로 기를 쓰고 들어왔다. 신발을 벗어 놓은 곳에 구더기가 기어 다니면 온몸이 간지러웠다. 비 오는 게 당시에는 가장 싫었다.
1982년, 작은언니는 9살 때부터 집에서 밥을 짓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파서 밥 하는 것에 소홀했다. 겨울이 되면 신경 쓸게 더 많았다. 겨울에는 연탄불 관리에 신경 써야 했다. 연탄불을 꺼트리면 엄마에게 크게 혼이 났다. 연탄불이 한 번이라도 꺼지면 비싼 번개탄을 사야 했다. 새벽에 한 번씩 일어나서 연탄불을 가는 것도 작은언니의 몫이었다. 부엌은 거의 밖이라고 해도 별반 다를 바가 없이 몹시 추웠다. 수도는 자주 얼었다. 엄마는 둘째 딸이 9살 때부터 집안일을 당연한 듯 시켰다. 맏언니는 이른 나이에 먼 타지에서 공장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집안일은 작은언니가 챙겨야 했다. 겨우 초등학교 2학년 생인데 겨울마다 꽁꽁 얼어버린 수도꼭지를 녹여서 설거지를 했다. 연탄불 위에는 항상 물을 담아 놓는 큰 솥이 놓여 있었다. 솥 안에 물 관리도 중요했다. 그 물이 있어야 얼었던 수돗물을 다시 녹일 수 있었다. 9살에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은 설거지와 동생 돌보기였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뜨거운 물을 조금 섞어 설거지를 하면 도움이 됐다. 6살인 동생을 챙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께 사랑받기 위해 착하고 말 잘 듣는 딸로 자랐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양력으로 생일을 지냈다. 그런데 작은언니는 생일을 음력으로 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늘 작은언니의 생일은 보통 20일 부근이 되었다. 아버지의 급여 날이 25일 정도였던 것 같다. 매년 날짜가 바뀌는 대도 하필 늘 25일 전이 작은 언니의 생일날이 되었다. 돈 관리가 잘 안 되는 부모님은 급여일 전에 돈이 쫄쫄이 마르는 게 일상이었다. 딸의 생일인 걸 모르고 지나치기가 일쑤였다. 안다고 한들 뭐라도 챙겨줄 여윳돈이 없었다. 어린 시절 생일날만 되면 작은언니는 자주 엄마에게 맞았다. 생일날조차 집안일과 심부름을 하고 자신이 밥을 해야 했으니 어린 나이에 그 서러움에 자주 울었다. 그러면 우는 것 자체가 궁상이고 미련 판다며 엄마는 작은언니를 더 혼냈다. 작은 언니 생일날은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자주 매 타작 날이 되곤 했다.
작은언니가 중학생 일 때는 배곯는 게 일이었다. 점심시간에는 학교 운동장에 나가서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수돗물을 마셨다. 그러면 허기가 좀 가셨다. 가끔 아빠나 엄마에게 용돈을 받았고 그런 돈으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맏언니가 일찍 공장을 다녔고 오빠까지 공장에 가자 고등학교를 간다는 것만으로도 작은언니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상업고등학교를 갔고 졸업하면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좋았다고 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방학 때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조기 취업으로 친구들보다 이른 시기에 취업했다. 회사가 수원이라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2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부천 집으로 들어왔고 부천에서 회사를 다녔다. 생머리였던 작은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머리를 길었다. 긴 생머리를 흩날리면 아주 세련되고 예뻐 보였다.
20대 초반에 직장 생활을 하는 작은언니는 인기가 많았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작은 언니는 나를 잘 챙겨주었다. 내가 중학생일 때는 다소 자신과 다른 나와 잠시 소홀한 시간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직장 생활을 하는 작은언니는 종종 나를 밖으로 불러내서 맛있는 걸 사주었다. 동생인 나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에 작은 언니가 함께해 주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자 학교 이야기를 하면 공통 화재로 재밌는 이야기가 수다로 오래 이어졌다. 내가 태권도 학원을 잠시 다닐 때도 사범님이 언니를 보고는 소개해달라고 안달이었다. 내가 봐도 작은언니는 20대 때 참 예뻤다. 긴 생머리를 하고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센스 있는 매무새였다. 당시 작은언니는 종종 섹시함의 아이콘인 연예인 김혜수를 닮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외모에 신경을 쓰고 다니니 그대로 멋이 되었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은 작은언니는 20대 초반에 길을 나서면 눈에 띄는 외모였다. 부천에서 일을 했지만 월급이 작았다. 더 돈을 벌기 위해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도 병행했다. 아버지가 투병을 하자 작은언니는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돌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버지의 진단을 들은 것도 오롯이 작은언니 혼자였다. 아버지는 사망선고가 내려지고 1년을 더 살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명을 예측하셨다는 듯이 언니에게 사귀는 남자친구를 데려오라고 하셨다. 작은 언니는 내키지 않았지만 아버지 성화에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를 집에 인사시켰다. 아버지가 서두르면서 남자친구와 급하게 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몇 개월 후에 작은언니는 아이를 임신했다.
그리고 임신 8개월에 작은언니는 아이 아빠가 그동안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동안 철저하게 속았다는 마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고민에 빠졌다. 당장이라도 헤어지고 싶었는데 뱃속에는 아이가 연신 발을 차며 놀고 있었다.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었고 싸웠고 화를 냈고 굶게 되었다. 정기검진에 산부인과를 찾았는데 큰일이다 싶었다.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먹는 것에 집중했다. 다른 건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아이 아빠는 작은언니가 화를 내면 빌기 바빴다. 임신 초반에 아이 아빠가 폭력을 행사했을 때 그냥 넘어간 것이 후회가 되었다. 남자가 아무리 빌어도 화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화를 내다가 이내 뱃속에 아이 걱정이 돼서 화내기를 멈추었다.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조카의 아빠인 작은 언니의 남자. 내가 한때 작은 형부라고 불렀던 사람. 그 사람이 착한 작은언니를 속였다. 아직 20대였는데 이미 한번 결혼을 했었다고 했다. 거의 만삭이 다 되어 혼인신고를 하러 갔다가 언니가 알게 된 것이다. 아이 아빠가 이혼 경력이 있다는 사실을 작은언니는 받아들여야 했다. 모든 가족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작은언니의 결정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엄마가 했던 말 중에 나는 그 말만 기억난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잖아, 쟤는 재취로 시집갈 거라고, 그게 쟤 팔자야." 맞다. 엄마는 작은 언니가 어렸을 때부터 가끔 그 말을 했다. 어린아이에게, 듣기에도 거북스러운 말을, 엄마인 당신이, 자신의 딸에게, 한 말이었다.
엄마는 우리가 어릴 때 한참 신병을 앓았었고 결국 신내림을 받았었다.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죽을 고비까지 겪었다고 했다. 그렇게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결정한 건 결국 숙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신내림을 받고 집안 한편에는 신당을 차려 놓았었다. 그것만으로도 엄마는 병이 괜찮아졌고 살 수 있었다. 엄마의 이상 행동들은 신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들에게 일부 면죄부가 되었다. 엄마의 특이한 행동, 말 등은 그런 사유로 가족들 모두가 한편으로 큰 의미를 두지 않기도 했다. 말이 거칠어서 자식들에게 말로 상처 주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당신이 아프면서 자식들에게 자주 매질을 했다. 그리고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남편이랑 싸우거나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는 자식들을 다 모아놓고 함께 약을 먹고 죽자고도 했다. 기억나는 것 중에 엄마가 '싸이렌'이란 독약을 펼쳐놓고 자식들을 다 먹이고 죽으려고 했던 장면이 있다. 한 번이 아닌 몇 번 있었던 일이었고 어렸던 나는 그때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울고 빌기를 반복했다. 엄마는 그렇게 화가 나면 행동에 제약이 없었다. 폭주한 기관차처럼 말에도 아무런 제동장치가 없었다. 자식들에게 뻑하면 '나가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자식들이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니들은 왜 나가서 뒤지지도 않냐"라고 욕을 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내가 나이가 들었는데도 나는 엄마에 대한 미움에 한동안 괴로웠다. 엄마가 한 행동 중에 아직까지도 내겐 가장 큰 상처들이 거름망 없이 쏟아졌던 수많은 폭언이다. 그중에 작은언니는 '재취'가 될 거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었다. 엄마인 사람이, 자신의 딸이 아주 큰 상심을 한 상태에서, 내뱉는 말에, 잔인한 맹독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남이 그렇게 무심히 내뱉는 말이었어도 내가 나서서 멱살잡이를 할 만한 폭언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엄마가 어렸던 작은언니에게 자주 했던 말이었다. 작은언니 뱃속 아기의 아빠인 남자의 거짓말에 충격을 받은 모든 가족들에게 엄마는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무심하게 내뱉었다. 그 말이 너무도 내겐 참혹하게 들렸다. 무분별한 폭언들은 매질보다 훨씬 큰 상처 자국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