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드디어 부천으로 발령을 받았다. 친히 발령 사실을 알려주셨던 인사부장님은 부천지점의 최고 책임자인 지점장님으로 오셨다. 부천에는 아직 사옥이 없을 때였다. 그래서 타 건물에 부천지점과 몇 개의 영업소가 밀집해 있고 몇 개 영업소는 흩어져 있었다. 첫날은 지점으로 출근하라고 해서 우선 지점이 있는 건물로 출근했다. 집에서 한 번에 버스를 타고 부천역 부근까지만 가면 지점이었다. 출근시간에 버스정거장까지 걸어갔다가 버스를 한 번만 타면 그게 끝이었다. 출근시간이 총 50분도 안 걸렸다. 대폭 짧아진 출근시간이 신기했다. 더군다나 지하철 1호선과 헤어져서 행복했다. 인사부장님, 아니 부천지점장님께 인사드렸다. 이후 지점 내에 있는 분께 인사를 시켜주셨다. 과장님들과 지점 선배님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온화해 보였다.
인상 좋은 지점 선배님들을 뒤로하고 안내받은 영업소로 출발했다. 방향이 부천역에서 우리 집 쪽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집이랑 보다 더 가까워졌다. 출근시간이 50분보다 단축된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좋았다. 버스에서 내렸다. 내가 소속된 영업소는 춘의동에 위치했다. 우리 집과 부천역 중간 정도 되는 곳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회사 간판이 보였다. 버스정거장에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렸다. 3층짜리 건물에 1층에는 빵집이 있었다. 빵집에서 달달한 빵 냄새가 길까지 은은하게 풍겨왔다. 매일 이런 빵 냄새를 맡으면서 출근할 생각에 입안에 단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사무실 앞에 들어가니 점포 이름이 붙어있었다. 영업소 이름도 너무 예쁜 '한마음 영업소'였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인수인계를 해줄 총무님이 있었다. 총무님과 소장님이 함께 반겨주셨다. 세 번째 맞이하는 소장님인데 이전 소장님과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4,50대 소장님들과 일했었는데 한마음 소장님은 딱 봐도 젊어 보였다. 알고 보니 소장님은 겨우 2년 차 신입 소장님이셨다. 29살로 나와 같은 20대 소장님이셨다. 젊은 소장님과 함께 일한다는 게 또 너무 좋았다. 소장님은 눈에 확~띄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편안하고 순둥 한 외모였다. 선하고 환한 미소로 반겨주시는데 순수하게 느껴졌다. 커피도 손수 타주셨다. 내 자리에 앉아서 인수인계를 받았다. 이제 제법 연차가 되니 인수인계는 서류 몇 가지와 위치 확인 정도만 있을 뿐 간단하게 끝났다. 중요 서류에 대한 안내까지 다 받았는데 반나절만에 끝이 났다. 인수인계를 해주고 기존 총무도 자신의 발령지로 떠났다.
한마음 영업소는 영업사원이 전부 설계사였다. 사무실에 모든 설계사분들이 여자였다. 기가 센 분들인 대리점사잠님들을 보다가 여자 설계사들을 보니 인상이 다들 너무 착해 보였다. 영업소에 설계사분들은 총 40여 명이었다. 직전에 근무했던 곳과 비교가 됐다. 안양 합동은 90명 가까이 있었던 대형 합동 대리점 점포였다. 평상시 출근자만 해도 60명이 넘었다. 가끔 출근하는 분들은 손이 오히려 더 많이 갔다. 대리점 사장님들은 여자 사장님보다 남자 사장님이 많았다. 남자 대리점 사장님들은 각자 카리스마가 있었다. 여자 사장님들도 다들 기가 무척 셌다. 사무실 크기도 기존 사무실에 비하면 반 정도라서 아담해 보였다. 빙~ 둘러본 사무실이 썩 마음에 들었다. 순하고 말랑한 인상인 설계사님들을 보니 마음도 편안했다. 98년 부천으로의 출근은 시작부터 그렇게 안락하고 만족스러웠다.
이상했다.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부천에서는 모든 일을 다했는데도 퇴근시간 안에 거의 업무가 끝이 났다. 신기한 일이었다. 입사 후 이렇게 일이 적었던 적이 없었다. 회사라는 곳은 원래가 그렇게 일에 치이며 업무를 해나가는 곳인 줄만 알았다. 입사 초창기엔 일이 미숙해서 더 할 일이 태산처럼 쌓였었다. 2년 차에는 대형 점포로 이동했으므로 일 양 자체가 많았다. 한마음 영업소에서는 꼼꼼하게 모든 부분들을 다 신경 쓰고 있는데도 중간중간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다. 그러다 보니 살짝 욕심이 들었다. 안양 합동 대리점 총무로 일할 때는 꿈도 못 꿨던 일이었다. 사무실 환경미화를 좀 신경 써보고 싶어졌다. 소장님과 의논하고 어떤 방향이 좋을지 방향을 잡았다. 여성분들이 많으니까 편안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내기로 했다. 문구점에서 몇 가지 소품들을 사 왔고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사무실을 꾸몄다.
다음날 외야 사원분들이 출근하면서 사무실 분위기가 바뀐 것에 만족해하며 칭찬을 해주셨다. 비싼 돈을 들인 것도 아닌데 몇 가지 소품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바뀌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보람됐다. 소장님께 다음번엔 영업실적 게시판을 꾸며보자고 제안드렸다. 실적을 나타내는 모양도 여러 가지로 뽑아보았다. 설계사님 이름도 색을 입혀 예쁘게 꾸몄다. 사무실 벽과 게시판에 변화를 주니 사무실이 더 예뻐졌다. 출근길에 달라진 사무실을 보자 설계사분들이 만족해했다.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지역별로 영업사원분들도 성향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일하면서 설계사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개개인이 너무 착해서 감동하는 일이 잦아졌다. 작은 것 하나를 배려에도 고마워하는 분들이 많았다. 한마음 영업소의 유순한 설계사님들은 총무로써 꼭 지켜달라고 당부드리는 규칙을 모두 다 너무 잘 지켜주셨다.
편안하고 즐거운 사무실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게 즐거워졌다. 그런 노력에 소장님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총무 덕분에 기분 좋게 하루가 시작된다며 자주 칭찬해 주셨다. 영업소에서 한 달에 한두 번 음식도 만들어 먹으며 분위기를 좋게 하는 이벤트도 시작했다. 일 잘하는 총무라며 소장님이 부천지점에서 칭찬한다는 소문이 돌아 돌아 내 귀에도 들려왔다. 가끔은 외부로 나가 맛있는 것도 사주셨다. 경력이 짧은 소장인데도 영업소 운영을 잘해 주셨다. 사무실 분위기가 좋아지자 보험회사에서 제일 중요한 지표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증원도 잘 이루어지고 매출이 매달 조금씩 성장하게 되었다.
출퇴근 시간도 줄었고 환경미화까지 두루두루 신경을 쓰는데도 계속 칼퇴근을 하게 됐다. 주말에는 오롯이 취미활동을 할 수 있었다. PC 통신 동호회 활동도 주말마다 이것저것 참여했다. 평일 근무시간 활용만으로도 총무일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경력이 쌓인 것도 있었지만 점포 규모에서 오는 업무량의 차이가 워낙 컸다. 매일 여유시간이 생길 때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회사 제안 게시판에 제안을 종종 올리기도 했다. 여러 가지 지표들 중에 고객만족도 조사에도 더 신경을 쓸 수 있었다. 업무량이 많지 않으니 전 건 전화를 다했다. 낮 시간 동안 짬을 내면 해피콜 미리 확인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모니터링 결과에 부결 건이 제로가 됐다. 사무실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이 안정되고 편안한 직장 생활을 이어가는 날들이었다.
영업조직에 있는 분들은 기분 상태에 따라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매달 영업 마감을 해야 하는 분들의 기분전환을 위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아침마다 어떤 음악으로 시작할까를 생각했다. 나 혼자만 듣는 게 아니라 다른 분들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음악을 더 자주 들었다. 당시에는 DJ DOC, 터보, 클론, Ref, 김건모, 김정민, 녹색지대, 김민종, 영턱스 클럽, 이문세, HOT, 쿨, 언타이틀, 박진영, 엄정화, 김현정, 쿨, 숍, 베이비복스, 젝스키스, 유승준, 핑클, 이정현, Y2K, SES, 지누션, 조성모 양파 등 좋은 가수들이 히트작 노래들을 계속 만들어줬으므로 들을 노래들이 가득했다. 어떤 분위기 때에 어떤 음악을 틀어줄까 고민했다. 음악을 열심히 들으며 노래가 풍기는 분위기마다 메모도 했다. 나는 라디오 DJ가 된 것처럼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선곡해서 사무실에 틀어줬다. 개그 욕심이 있어서 당시 아주 히트 쳤던 '똑 사세요 ~'등 드라마 <육 남매>의 유행어로 사람들과 웃기기도 했다.
평온한 회사 생활에 반해 집에서는 일이 있었다. 작은언니가 임신하고 8개월 차에 사건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