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신입 기획자의 면접관 체험기라는 글을 적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월, 제게도 첫 부사수가 생겼습니다. 실무 경험이 이제 갓 1년이 된 제게 누군가의 사수가 된다는 것은 설렘보다 걱정이 앞서는 일이었습니다. "나도 아직 잘 모르는데, 내가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함께 시작되었던 9개월의 여정에 이제 마침표를 찍으려 합니다.
오늘은 그간의 시간을 돌아보며 제가 어쩌다 사수가 되어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 그리고 서로 부족했음에도 함께 노력해서 일궈낸 작은 성취들을 기록해보려 합니다.
제가 처음 사수가 되어, 가장 어려웠던 건 저만의 '정해진 틀'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저 역시 사수 없이 직접 부딪히며 일을 해온 터라 정해진 업무 매뉴얼이 없었고, 때로는 체계적인 프로세스보다 당장 떠오르는 것들을 우선적으로 전달하곤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기획의 기본적인 플로우나 우리만의 업무 기준을 초기에 더 명확히 잡아주었더라면, 부사수가 업무에 더 빠르게 적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특히 저는 스스로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제 생각이 정답이 아니니 자유롭게 시도해 보세요"는 말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업무를 시작한 부사수 입장에서는 가이드 없는 자유가 오히려 큰 부담이었을 것이고, 그 순간들이 많이 막막하지 않았을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다가도 또 어떤 날은, 혼자 1년의 시간을 보내며 굳어진 '나만의 정답'을 부사수에게 들이밀기도 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와 부사수와 나눈 대화들을 돌아보면, 정답이 없는 문제인데도 내 방식을 은연중에 강요하며 답답해하진 않았나 싶어 아차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정말 한동안은 '믿고 맡기는 자율'과 '디테일한 가이드' 사이에서 적절한 접점을 찾기 위해 참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의 과정 속에서 제 스스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한 번 더 고민하고, 내 논리가 잘 전달되지 않을 때는 답답해하기보다 내가 전달하는 방식이 부족하지는 않았나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법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이런 서투름 속에서도, 스스로 이것만은 잘했다 싶은 것들도 있습니다. 저는 뭔가 선배(?) 노릇을 하기보다 "나도 잘 모르지만, 우리 같이 해보자"라고 말할 수 있는 솔직한 동료가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유저 인터뷰를 준비하며 떨릴 때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저도 처음인데 같이 해볼까요?"라며 먼저 이야기하며 함께 준비하고 배워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의 가장 큰 목표는, 부사수가 앞으로 어딜 가서든 지금 회사에서 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제 몫을 다하는 기획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기획자나 PM 공고를 검색하면 JD에 나오는 UI/UX 리서치, IA 작성, 유저 플로우 설계 같은 것들에 대해서 그저 화려한 단어에 그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서툴더라도 직접 기획 뼈대를 잡고, 유저를 만나고, 문서를 작성하고 또 깨져가며 실무의 흐름을 그대로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나아가 실무의 흐름을 익히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기획의 디테일’을 꼭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기획자가 단순히 "필터 기능 넣어주세요"라고만 적어두면 개발 단계에서는 수많은 질문이 쏟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필터 선택 후 '적용' 버튼을 눌러야 하나요, 아니면 즉시 반영인가요?", "결과가 없을 때 Empty Case는 정의되어 있나요?" 같은 구체적인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기획자가 초기에 케이스를 꼼꼼히 정의하지 않으면, 이러한 확인 과정은 수차례 반복됩니다. 질문에 하나하나 답변하고, 때로는 그 답변에 따른 또 다른 의견을 설득하는 데 에너지를 쏟다 보면 결국 기획의 빈틈이 동료와의 소모적인 핑퐁을 만드는 원인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기획 문서의 디스크립션 한 줄을 쓰더라도 예외 케이스와 데이터의 흐름을 꼼꼼하게 정의하는 법을 함께 고민하고 나누었습니다. 기획자가 꼼꼼히 채운 한 줄이 실제 개발 단계에서의 소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줄이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요소를 전달할 때도 단순히 "여기에 이런 버튼을 넣었습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화면에서 유저는 이러한 행동을 해야 하기에 이 요소가 필요하고, 시각적으로도 가장 강조되어야 합니다"와 같이 '목적' 중심으로 소통하는 법을 강조했습니다. 즉, 주관적인 느낌보다는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대화하는 태도를 함께 연습하려 노력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과정은 부사수뿐만 아니라, 저 스스로에게도 기획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일깨워주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끝으로, 서툰 사수를 만나 9개월간 함께 고생해 준 나의 첫 부사수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나도 아직 잘 모르는데"라는 걱정으로 시작했던 이 시간이 저를 한층 더 나은 기획자로 만들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기획자로 나아가겠지만, 함께 고민했던 시간들이 서로의 성장에 단단한 밑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 또한 이번 경험을 발판 삼아, 다음번에는 조금 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수가 되어보려 합니다.
언젠가는 지금 보다 더욱더 성장한 서로의 모습으로 다시 마주하기를 기대하며, 그날에도 든든한 동료로서 함께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