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ing for Meaning
전쟁은 언제나 강제수용소를 만들어낸다. 수많은 전쟁포로와, 정치범, 심지어 민간인까지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수감자들에게는 전쟁의 참혹함과 경쟁하는 것 같은 삶이 주어졌다. 특히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대표되는 2차 세계대전 중의 강제수용소는 수용소의 숫자, 거기에 수감된 사람들의 수, 그리고 전쟁포로도 아닌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죽음의 수용소'에 가까웠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노역을 하며 죽어갔고, 죽어가던 중에 쓸모가 없어졌다고 판단되면 가스실로 보내져 더 효율적인 죽음의 희생자가 되었다.
유대인 강제수용소는 그 피해의 규모와 잔혹함으로 인해, 또 그 일을 저질렀던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했기 때문에 세상에 잘 알려지게 되었다. 수용소의 부조리함과 거기서 일어난 잔인한 일들은 수용소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증언과 수용소에 대한 고증을 통해 기록되었다. 수용소 내의 이야기가 대부분 그 일을 실제로 겪은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의 말과 글을 통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주관적인 서술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 삶의 객관적인 잔혹함에 더해 그들의 주관적인 서술까지 더해지게 되니 수용소의 삶을 다룬 대부분의 소설이나 그 밖의 글은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그 일을 다룬 다른 책들과 다른 한 가지 특징은 여기에 있다. 그는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에 정신과 의사였다. 그만큼 사람의 정신, 심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수용소에서 살아가면서도 그는 사람의 정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수용소에서의 삶을 책으로 썼지만 거기서도 학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잔혹한 사실을 묘사하되, 굳이 그 잔혹함을 더 드러내기 위해 주관적인 서술을 줄이고 마치 제삼자인 것처럼 그 사실에 대해 분석하고 이해한 내용을 덧붙였다. 다른 책이 수용소에서의 삶을 주관적인 감상으로 서술했다면 빅터 프랭클은 사실은 사실 자체로 두고 그 현상을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죽음과도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한 결과를 그의 심리학인 '로고테라피'와 연결 짓는다.
수용소에서 그가 느낀 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그곳은 모두에게 죽음과도 같은 환경이었지만 모두가 이를 죽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최악의 환경에서 누군가는 삶을 포기하고, 더 악랄해지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더 힘든 상황으로 내몰아가며 살아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환경에서조차 삶의 의미를 찾고, 유머를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가며 살아간다. 환경은 같지만 대응은 다르다. 빅터 프랭클은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 수용소에서조차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간 사람들이 가진 것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답을 수용소에서의 삶 이후 다시 정신과 의사로 돌아간 자신의 삶에서 활용한다. 자신에게 치료를 받으러 오는 정신 질환자들 또한 내면은 수용소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기 때문에 그들이 수용소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처럼 바뀌도록, 그가 찾은 '답'을 제시한다.
그 답은 무엇일까?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얻은 답은 바로 '삶의 의미'다. 그 의미를 무엇에서 찾든 상관없이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그 시련초자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으로서 수용했다. 반대로 수용소에서 곧 죽게 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특징을 보였다. 힘든 생활을 이어나가던 사람도 어느 순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어갔다. 결국 환경을 떠나서 사람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였다.
누군가에게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삶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고, 삶의 의미가 되어 삶을 지탱하는 요소가 된다.
또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삶의 의미가 된다. 수용소 밖에서 자신을 기다릴 아내와 아이들, 부모님, 모든 가족들이 삶의 의미가 되어 힘든 시간을 버텨낸다.
일도 사랑도 아니어도 상관없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존엄성을 잃지 않으며 자신의 삶에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은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면 현재를 소홀히 살아갈 수 없다. 밝은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현재를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악랄하게 하거나, 무기력하게 살아가거나, 수동적인 자세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빅터 프랭클은 마음의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문제까지는 아니어도 고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보도록 조언한다.
삶의 의미를 갖는 것은 항상 중요한 것으로 이야기되어 왔지만 요즘 들어 더욱 그것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듯하다. 수용소와는 견줄 수 없지만 전체적인 환경이 전보다 녹록지 않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미래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더 부유하고 넉넉한 삶을 살 것이라는 믿음이 깨지고, 젊을 때 열심히 일하는 것이 노후의 안락함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깨지고, 서로 다른 문화나 국가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세계를 아우르던 키워드가 성장과 개방이라면 이제는 침체와 폐쇄가 새로운 키워드가 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낙관보다는 미래에 대한 비관을 키우게 만든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관은 삶의 의미를 미래의 물질적인 부에서 찾던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앗아간다. 무기력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분노로 가득 찬 사람들이 늘어나고,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빅터 프랭클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답은 삶의 의미에 있다. 삶의 의미를 경제적인 부에서 찾기 어려워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아야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사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부에서 찾지 않았다. 수용소에서의 삶에 부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이런 것들은 퇴색되지 않는다. 주변 환경이 변하더라도 언제든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야 한다. 퇴색되지 않고, 잃어버릴 수 없는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 때이다.
책에서 종종 빅터 프랭클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아마 이 말이 그가 찾은 답, 그리고 로고테라피의 핵심을 가장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