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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가게와 따뜻한 겨울

[나의 글/ 아침을 열며/한국일보 2018.10.27.]

내가 사는 분당은 이제 근 3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신도시 아닌 신도시가 되어 버렸다. 입주 초기, 쌔끈하고 깔끔했던 근린상가들은 이제 곳곳에 먼지가 끼고 색도 조금은 바랬지만, 친근한 시골 시장같은 느낌이다. 저녁이면 퇴근길의 샐러리맨과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 호프집에서, 닭갈비집에서 왁자지껄 담소를 나눈다. 



하지만, 산책길에 바로 어제까지 들렀던 가게가 문을 닫고 ‘임대’라는 푯말과 함께 휑한 내부를 드러내는 걸 발견하기도 한다. 가게 하나는 가족 하나의 삶이 달려 있는 곳이다. 신혼부부가, 군대 다녀온 청년이, 기업체를 나와 야심차게 새로운 삶을 설계하던 누군가가, 온전히 자신의 생계와 보람을 의탁한 곳이었다. 그런 곳이 언제 사람이 있었냐는 듯 을씨년스러운 공백을 보여 주는 그 순간만큼은, 마치 나나 나의 가족이 그 가게의 주인이었던 것처럼 울적해지고 서럽다. 



동네 커피전문점에 관해 말해 보자면, 십 년째 커피콩 자루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을 배경삼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부자(父子)의 가게도 보이고, 아주 작은 공간에 의자 몇 개 놓은 대신, 파격적인 아메리카노 가격으로 승부하는 청년의 가게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경쟁자는 다른 커피전문점만이 아니다. 커피를 파는 제과점, 아이스크림 가게, 심지어 핫도그가게도 그들의 경쟁자가 되기도 한다. 만약 원두를 분별할 만한 탁월한 미각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이제 어느 가게에서든 원두커피를 즐길 수 있기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고, 커피전문점 주인 입장에서는 애달프다. 큰 가게에 수억 원의 체인점 개설비용을 들였을 법한 어느 커피 전문점은 이달 말로 문을 닫노라고 현수막을 내걸었다. 아침 산책길마다 ‘내일은 저기 꼭 가야지’ 했던 그 가게가 문을 닫는다 하니, 나의 게으름이 그곳 주인장의 등을 떠민 것 같아 미안하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에 입주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동네 제과점을 보면 나의 감상은 차츰 이성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이런 잘 나가는 동네 가게의 비결은 무엇일까? 발음도 어려운 프랑스 사람 이름을 간판으로 달아서 그런걸까, 아니면 정말 특별한 재료를 쓰는걸까 모르겠지만, 표준화된 체인점 빵과 케이크맛에 질린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찾아올 만한 빵집이다. 이렇게 관심을 갖다보니 나도 어느 새 그 집 우유식빵은 아침 열 시는 되어야 나온다는걸 알아 버렸다. 



이런 강자에는 지하 한 구석에 있는 잡어회 식당도 빼먹을 수 없다. 동해안에서 어부를 하는 친척에게 매일 잡어들을 산지직송 받아 회를 쳐, 회덮밥과 잡어회 모듬과 매운탕을 내놓는다. 역시 낡고 어두컴컴한 지하상가를 외롭게 훤히 밝히는 등대같은 집이다. 이곳의 줄이 너무 길어지면, 덕분에 이웃한 다른 가게들도 덩달아 신이난다. 줄이 길어 호기심에 들어갔던 옆 가게가 괜찮아 다음에 또 가는 경우가 바로 동네 탐험의 재미다. 



때아닌 동네 가게 열전(列傳)은 경기침체와 인건비 상승으로 자영업자가 힘겨워하는 이번 겨울에, 동네 가게 탐험에 나가보자고 재촉코자 함이다. 이제 주머니에 손 넣고 집에서 막 입는 복장으로 동네 상가를 어슬렁거리며 새로운 강자를 찾아보자. 그래서 우리가 버는 돈이 다시 잘게 쪼개져 다른 이웃 누군가의 주머니로 들어가 그들 가족에게 웃음과 좀 더 나은 저녁밥상이 되도록 해 보자. 입으로만 경제민주화 하지말고, 이웃 가게들과 공생하는 소비자가 되었으면 하는 짧은 생각이다. 지방자치단체가 발행한 지역화폐를 써 보는 것도 좋겠다. 우리가 동네에서 발굴한 가게의 맛있는 음식과 멋진 서비스가 일상을 차지해 갈 때, 지역경제의 활력도 조금씩 돌아오게 되지 않을까? 동네 가게와 함께하는 따뜻한 겨울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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