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삶과 문화/한국일보 2013.1.31.]
귀국한지 한 달이 지났다. 한국에 잠시 들를땐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막상 귀국해보니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선행학습' 열풍에 빠져있음을 느끼게 된다. 일부 유치원에서는 초등학생 과정을 조금이라도 먼저 가르치느라 여념이 없고, 어떤 초등학생들은 명문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미적분까지 배운다니 참으로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중학교때 영어를 처음 접했다. 영어책을 펼쳐서 단어 하나 하나를 익힐 때마다 외국인 친구가 하나씩 늘어난다고 생각했었다. 언젠가 영어 사전에 나온 단어를 모두 이해하게 되면 바다건너 서양인 누구에게든 말을 걸고 친구를 맺을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 덕분에, 영어 공부를 하는건 차라리 즐거움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아침에 이불을 개며 January(1월)에서 December(12월)까지 열심히 외쳤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영어를 좋아하다보니 결국 중학교 수준의 영어책으로는 지적인 허기를 채울 수 없어 영어 소설과 단행본을 찾아 읽기에 이르렀다. 스스로 선행학습을 한 것이다. 그렇게 쌓은 인문 소양은 내가 서른 살이 넘어 유학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짧은 기간에 미국 사회에 적응하고 교수직을 잡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이렇듯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선행학습은 그 효과가 참으로 크다고 믿는다. 하지만 '다른 집 아이도 하니까' 또는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선행학습을 억지로 해야한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보다 가장 큰 손실은 '발견 효과'다. 무심코 집어든 책이나 얼떨결에 본 영화에서 평생 마음속에 간직할 좌우명을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발견 효과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적성과 길을 발견하게 되면 지적으로 더 깊은 정보를 갈구하게 되어 자발적으로 독서와 정보탐색의 여행을 떠나는 형식이 바로 이상적인 선행학습의 모습이다. 이 때 학교 선생님이나 부모님 또는 관련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최고의 타이밍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온나라에 만연한 선행(先行)학습이 선행(善行)이 되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선행'을 빌미로 스스로 고민하고 깨닫는 즐거움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1학년 학생에게 2학년 과정을 미리 가르쳐 정작 2학년이 되었을 때 교실 구석에서 지루한 하품을 하는 모습이 계속 반복된다면, 아이는 학교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경외를 잃어버리고 사교육에 줄곧 의지하게 된다. 이런 의존이 지속되면 아이가 학교의 교과과정에서 유리되어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며, 앞서 얘기한 '발견 효과'를 영원히 누리기 힘들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낼 기회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것만 가르쳐주는 선생님에 대한 멸시, 학교 공부를 얕잡아 보는 오만, 그리고 지적인 배고픔을 느낄 수 없는 고약한 불감증에 빠지게 될 것이다.
또한 선행학습을 많이한 아이들에게 '영재'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은 피해야할 것 같다. '영재'는 누구인가? 어린 나이에 '영재' 대접을 해주는 세상에 대해 어린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은 무엇일까? "나를 영재로 대접해주니 고맙다"보다는 "나는 영재이니 다른 아이들과 달리 특별하다"는 치기어린 우월감이 아닐까?
특별한 소질과 열망을 가진 아이들에게 특성화된 교육을 제공하는건 꼭 필요하고 그런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존재하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다만 채 피지도 않은 꽃들에게 성급한 호칭을 부여하는 교육에는 물음표를 던지고 싶다. 그 '영재'의 면류관은 인생 내내 아이들을 옥죄는 쇠사슬이 될지도 모른다. "너는 '영재'라더니 그것밖에 안돼?", "너는 '영재'라더니 돈을 그것밖에 못벌어?" 주위의 지나친 기대는 아이들이 자유로운 지적 탐색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는 여정을 방해하지 않을까.
영재의 영재성은 점수표의 숫자보다 아이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 선택의 여지를 풍성하게 해주는 그런 교육. 학생들이 자신만의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교육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