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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의 본질

[나의 글/삶과 문화/한국일보 2013.4.4.]

외국에서 살 때 아름드리 나무를 타고 놀던 작은 아이가 귀국한 뒤에는 집안의 화분과 동식물에 유독 깊은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조금씩 사다 키우던 '구피'라는 물고기가 번식에 번식을 거듭해서 이제는 대식구가 되어버렸다.


물고기에 조금 싫증이 난 아이들이 최근에는 거북이 타령을 시작했다. 약지만한 작은 거북을 두 마리쯤 어항에 넣어둘까 싶어 동네 마트를 찾았다. "요 거북이 두 마리 주세요"라고 말을 건네자 마트 직원이 의외의 대답을 내놓는다. "손님, 어항 크기는 얼마나 큰가요? 어떤 물고기랑 같이 키우시는지요? 수온은 어떤가요?"


아이들이 동물을 가리키면 얼른 봉투를 꺼내 싸주기 바빴던 여느 마트직원과 달리 이 직원은 다양한 물고기와 수생생물의 적정 온도, 적당한 수조크기, 심지어 다른 동물과의 공생 궁합까지 체득하고 있었다. 그는 오랜 기간 동물 판매 코너에서 일하면서 물고기를 15마리나 사가서 다음날 다 죽었다고 또 사러 오는 고객, 새끼를 낳았을 때 그냥 방치해서 다른 성체에게 잡혀 먹혔다고 속상해하는 고객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래서 작은 생명체라도 그냥 무조건 판매하고 싶은 마음을 이제는 컨트롤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 집의 소형 어항으로는 구피와 거북이를 함께 키우기에는 무리라는 판정을 받고 빈손으로 나왔다. 하지만, 귀가 길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마트의 그 젊은이는 자신이 갖고 있는 업의 본질을 명확히 꿰뚫고 있었다. 단순히 물고기 파는 점원이 아니라 생명을 분양하는 전문가라는 사실을. 고객들이 생물들을 사가서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걸. 심지어 고객이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매출감소를 감수하고라도 절대 팔아서는 안 된다는 걸. 그 판매원의 자상한 설명 때문인지 거북이 타령을 하던 아이들도 어항을 하나 따로 마련할 때까지 조금 더 참아보기로 했다.


요즘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내가 만난 물고기 판매사원보다 훨씬 못한 직업의식을 가진 기자들이 새삼 많음을 느낀다. 북한이 연일 핵전쟁 위협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한미 연합군이 반격할 때 핵심 전력으로 사용될 폭격기의 성능을 마치 전쟁무기 카탈로그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과연 남북간 긴장 해소에 무슨 도움이 될까? 물론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우리의 안보역량을 과시해주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 갈퉁을 비롯한 '평화 저널리즘(Peace Journalism)'을 주창하는 학자들은 무력도발의 긴장이 고조될 때 우리 편과 적이 싸우면 어떻게 될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까에 초점을 두는 언론보도를 대표적인 '전쟁지향 저널리즘(War Journalism)'의 사례로 꼽는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언론보도는 냉정하게 피아의 의도를 분석하고, 어떻게 해야 평화적 과정을 통해 갈등을 예방하거나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에 골몰해야 한다. 갈등이라는 현상이 아니라 '왜' 그런 갈등이 발생하며 '어떻게'하면 평화적인 프로세스를 통해 그런 갈등을 예방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얘기다.


안보 이슈만이 아니다. 어느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최근 물의를 일으킨 별장 성관계 동영상을 선정적으로 재연하기까지 했다. 그런 뉴스의 제작진은 아무래도 방송 저널리즘이라는 업의 본질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아무리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방송이라지만, 매체수가 많아지면 시청자들이 더 나은 정보를 접할 것이라던 그들의 논리가 이제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는 형국이다.


한 사람의 물고기 판매사원이 거북이도 살리고 아이들에게 생명존중의 사상을 심어주었듯이, 한 꼭지의 뛰어난 보도는 시청자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우리의 방송 저널리즘이 서구 상업방송의 못된 점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언론으로서 진정한 '업의 본질'로 돌아와 주기를 간곡히 호소한다. 단순한 이윤추구냐 아니면 사회적 공기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냐는 아주 중요하고도 간단한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결코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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