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삶과 문화/한국일보 2013.3.14.]
모두가 소통을 말한다. '소통 경영', '소통의 달인', '국민과의 소통' 등 수많은 미사여구가 우리에게 오늘도 내일도 소통해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소통하지 않으면 훌륭한 리더도, 교사도, 정치가도, 심지어 예술인도 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소통의 전제에 관해서 언급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소통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전제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서론은 관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네 조급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소통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부터 짚어보자. 소통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학술적으로 '태도변용'(attitude change)이라고 한다. 태도변용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유능한 협상가는 자신과 함께 테이블에 앉게 될 상대측 대표의 인적사항은 물론, 성격과 성장환경까지 공부한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면, 그가 좋아하는 얘기를 먼저 꺼내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할 수도 있고, 그가 싫어할 만한 거대한 제안으로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요구 조건을 낮춰가는 방법으로 상대의 양보를 유도해 낼 수도 있다.
일단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갖춰진 다음에는 어떤 메시지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까 고민해야 한다. 메시지 전략에는 유머나 신변잡기 같은 가벼운 얘기를 담는 전략도 있고, 목적의식을 날 것처럼 드러내면서 내 의사를 관철시키려 하는 '돌직구'형 전략도 있다. 물론 두 가지의 적절한 배합도 가능하다. 대화 내내 너무 가벼운 얘기로만 점철했다가는 소통의 내용이 사라지기 마련인 반면, 상대방을 노려보며 내 의사를 강요하려다가는 상대가 위축되어 도망가기 쉽다. 극단적으로는 공포를 조장해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위협이나 모욕의 전략이 쓰이기도 하지만, 상대방과의 관계 단절을 수반하는 큰 도박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소통의 메시지를 어떤 채널에 담을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아들과 따스한 차 한 잔 놓고 부드럽게 일 대 일로 대화할 것인가, 전세금을 빼주지 않은 집주인에게 차갑고 냉정한 내용증명 한 장 덜렁 던져줄 것인가, 아니면 보기 싫은 부장님께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퇴사를 통보할 것인가. 마샬 맥루한이 지적했듯이 미디어는 곧 메시지이기에, 채널은 메시지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
이쯤에서 앞서 얘기한 소통의 전제로 돌아와 보자. 내가 아무리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훌륭한 메시지를 준비해 두었고, 상황에 딱 맞는 채널을 사용한다 해도 소통의 전제를 모른다면 별 의미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소통의 전제란 "내가 틀렸을 수도 있고, 당신이 틀렸을 수도 있소. 일단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해 봅시다. 내가 틀렸다면 기꺼이 태도를 바꾸어 협조하겠소. 그러니 당신도 내 말이 더 맞는다면 따라주시오"같은 마음가짐이다. 다시 말해 소통은 내 의견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개방적 사고에서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상대에게 내 의사를 강요하는 일방향의 몸부림 이상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무조건 100을 얻어야 하고, 상대는 내 의사에 굴복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소통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강요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소통의 전제보다 이러한 강요의 소구가 훨씬 일상적이다.
'강행처리'와 '결사저지'에 익숙한 우리 국회는 소통의 전제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들은 단지 새로 생긴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예전 같은 강요적 방식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이슈에 관해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내는 해결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거리의 플랜카드와 미디어를 이용해 여론몰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승패'에 익숙한 문화에서는 소통의 전제가 필요 없다. 하지만 '해결책'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개방성을 바탕으로 상대의 논리에서 말이 되는 부분을 수용할 수 있다.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는 데서 진정한 지혜를 얻을 수 있듯이,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고에서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