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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도 문화다

[나의 글/삶과 문화/한국일보 2013.1.10]

미국 월스트리트 현지에서 일하는 어느 금융인에게 들은 얘기다. 한 금융기업에서 사람을 해고할 때에는 해고일 당일 아침에 전화로 통보한다. 그러면 해고된 사람은 자신의 물건을 챙겨 가기 위해 회사를 방문하는데, 절대 사무실 안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회사 기밀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다. 대신 그는 사무실 밖에서 대기하다가 동료가 챙겨온 자신의 물건을 들고 쓸쓸히 떠나야 한다. 반대로 스스로 회사를 떠나는 경우는 어떨까. 요즘은 핸드폰 문자 한 줄로 회사를 떠난다는 통보만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떠나는 입장에서야 뭔가 마음에 남는 응어리가 있어 아무런 소통도 하지 않고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법도 하다. 하지만 문자 한 줄의 이별은 그동안 함께해 온 동료들에 대한 예의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렇듯 냉랭하고 사무적인 해고와 사직의 문화는 미국에서도 일부 기업에 국한된 것이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경제행위도 곧 문화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팁'이라는 문화의 예를 들어보자. 처음 미국에 간 사람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것이 바로 '팁' 문화다. 아시아의 식문화에서는 음식값에 식당이라는 장소와, 그곳을 점유하는 시간, 그리고 음식을 주문받아 전달하는 일체의 서비스가 포함되어 있다. 반면 미국에서는 '팁'을 통해 손님이 식당 종업원의 서비스 질을 평가한다. 양질의 서비스를 받았다고 판단한다면 음식값을 기준으로 20% 정도의 팁을 추가로 지불하고, 아주 불쾌한 서비스를 받았다면 거의 내지 않을 수도 있다. 


팁은 대부분 종업원들이 나눠 갖지만, 업주 입장에서는 자신이 져야할 임금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많은 종업원을 고용해 더 많은 팁을 받기 위한 서비스 경쟁을 시킬 수 있다. 업주는 팁을 많이 받아오는 종업원이 곧 고객에게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한 사람이므로 자연스럽게 승진을 시킬 수도 있고, 항상 적은 팁을 받는 종업원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팁'은 고객과, 업주, 그리고 식당 종업원간의 상호 감시와 이익 배분을 포함하는 일종의 상관행(商慣行)이자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경제행위를 문화라고 본다면, 우리나라의 문화는 갈수록 암울해지는건 아닌가 걱정된다. 정규직과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훨씬 낮은 보상을 받는 것을 당연시하는 문화. 소수의 '정규직'에 편입되기 위해 동료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극. 그런 비정규직의 참상을 보면서 정규직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계속 '사다리를 걷어차야' 하는 현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미 정규직이면서도 40대 초중반에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이직 등 전혀 다른 삶을 '플랜 B'로 준비해야 하는 젊은이들.

이런 문화는 개별 기업과 종업원의 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대형 발주처 '갑'에게 잘보이기 위해 담당 직원에게 여행, 용돈, 술자리 등 사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을' 기업 직원들의 고충은 종종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다. 매출 증대를 위해 사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문화. 이것이 많은 기업과 그 종사자들을 힘들게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는 우리가 매일 숨쉬면서도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는 공기와 같다. 쉽게 더럽혀지고 일단 오염되면 회복이 쉽지않다. 그런데 아주 심각하게 더러워지기 전까지는 오염의 심각성을 알아채기도 어렵다. 오염시키는 데는 소수의 비행(非行)으로도 충분하지만,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이들의 관심과 노고가 필요하다. 비록 잠시 우위에 있는 사람이나 기업일지라도 먹이사슬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갑-을의 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이는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갑-을의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는 관습과 관행과 문화의 문제다. 곧 들어설 새 정부가 할 일은 어쩌면 국민들이 어떤 '문화'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지 보듬고 경청하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국민들의 참여까지 동반된다면 우리의 문화는 들이마시기에 훨씬 상쾌한 공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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