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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의 시대'에 필요한 것

[나의 글/삶과 문화/한국일보 2012.2.9.]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면, 거의 예외 없이 다양한 전망이 넘실대곤 했다. 라디오가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지리적 장벽이 완전히 무너져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고 한바탕 호들갑을 떨었었다. 마샬 맥루한은 텔레비전의 등장을 논하면서 인간의 여러 가지 감각을 확장시켜주는 매체이자, 모든 이들의 감각적 경험을 통일시켜 원시 부족에서 경험했던 일체감을 되살려준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매체는 무엇일까. 두말할 것 없이 페이스북, 트위터와같은 '소셜미디어'다. 참으로 기발한 이름이다. 여기서의 '소셜'은 '소셜사이언스'(사회과학), '소셜리즘'(사회주의), 요즘 유행하는 '사회적 기업'에서의 '소셜'과는 다르지만, 적어도 그 취지의 일부는 공유한다. 바로 다수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나누어 갖는 미디어라는 점이다.


소셜미디어에서 '나눔' 목적물은 전혀 제한되지 않는다. 개인의 시시콜콜한 감상일 수도 있고, 멋진 사진일 수도 있고,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일 수도 있고, 오늘 신문을 읽으면서 발견한 멋진 기사일 수도 있다. '나꼼수'같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한 논평의 매체이자 자신의 전문성을 뽐내는 일종의 광고판 역할을 하기도 하며, 많은 이들을 상대로 연설하는 '타운 홀 미팅'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런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사람들에게 '접근'의 기쁨을 준다. 트위터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나 달라이 라마 같은 종교지도자들과 '친구'를 맺을 수 있을까. 공지영이나 이외수 같은 유명작가와 평범한 독자들이 한바탕 논쟁을 벌이는 일이 가능은 할까.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사람들의 '관계'를 창출하고 복원하기까지 한다. 페이스북은 내 학교 정보를 바탕으로 수십년간 연락이 끊겼던 초등학교 동창을 찾아내 '친구 목록'에 넣지 않겠느냐고 꼬드긴다. 트위터는 내가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뽑아내 그런 속성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연결해보라고 넌지시 목록을 내민다. '소셜'을 통해 비슷한 취향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는 점점 견고해진다.


그렇다면, '소셜' 때문에 우리가 빼앗기고 있는건 무엇일까.

먼저 소셜미디어는 우리의 시간과 집중을 빼앗아간다.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스마트폰은 페이스북 친구가 무엇을 했는지, 누구의 글을 읽고 좋아라 했는지 등의 굳이 알아야할 필요조차 없는 내용까지 구구절절 업데이트 해준다. 우리는 이 '소셜'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여간한 의지를 갖지 않고서는. 이제 화장실에서도 도서관에서도 수시로 스마트폰을 쳐다보는게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니콜라스 카는 그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소셜미디어가 수시로 제공하는 기발한 단문들의 향연과 그로 인한 집중력의 붕괴는 우리로 하여금 수 백 페이지의 책처럼 장대한 내용을 담은 미디어를 점점 외면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더 이상 긴 글에 집중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책과 같은 미디어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구성요소인 시간이 '소셜'로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이제 우리는 엄격한 자기 규율을 요구하는 삶의 패턴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 같다. 매학기 강의를 시작할 때면, 나는 반드시 당부한다. 수업시간 중에 텍스팅(문자보내기)을 하지 말 것. 하지만 이 '소셜'한 젊은이들은 본인도 모르게 수업시간에도 휴대폰에 시선이 머문다. 그들은 단지 물리적으로 강의실에 있을 뿐이다.

자기규율이란 그다지 거창한 일들이 아니다. 주말 동안은 스마트폰의 수시 알림 기능을 꺼두거나 통화 기능만 살려두는 것.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아이패드뿐만 아니라 책의 즐거움도 느껴보게 하는 것. 누군가를 팔로잉하기 전에 고민부터 해 보는 것. 이 모든 일이 '소셜의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무엇이라면 주저 없이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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