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삶과 문화/한국일보 2013.8.13.]
인간의 욕구는 도대체 몇 개쯤 될까? 아마도 쉽게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욕구를 어떻게 하면 채울 수 있을까, 라는 다음 단계 질문도 역시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문제에 관해 현재 '와이어드 매거진'의 편집자를 맡고 있는 크리스 앤더슨이 쓴 <롱테일>이란 책이 나온 지도 벌써 7년째다.
인간의 욕구는 무수히 많지만, 예전의 대량생산 시대에는 그 욕구 자체를 획일화하고 유형화해서 20% 정도의 사람들이 갖는 80% 정도의 대표적 욕구를 채워주는 상품을 만들어 효율성을 높였다. 하지만 인터넷의 등장 이후 사람들은 남들의 소비성향을 추종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욕구를 채워주는 상품을 전 세계를 뒤져서 주문하기 시작했고, 이제 기업들도 그런 변화를 무시할 수가 없다.
우리 정부도 '롱테일'로 변화하는 시민들의 욕구를 고려하여 '정부3.0'을 들고 나왔다. 정부 3.0은 시민 개개인의 욕구까지도 미리 예측하고 대응하는 시스템을 표방하고 있다. 거기에 꼭 필요한 게 바로 투명성 제고와 데이터의 개방이다.
그런데 그런 다양해진 욕구에 유독 둔감한 영역이 하나 있다. 바로 정치다. 요즘 세상에 기업은 소비자의 욕구를 단순화시키면 망하는데, 정치는 일부러 소비자(유권자)를 극단적 입장으로 유도한다.
그리고 양극단의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 정치를 혐오하게 한다. 아예 정치라는 상품을 사지 말고 가만있으라는 얘기다. 정치혐오는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그 공백에서 정치인들은 자신의 사익(私益)을 추구한다. 정치는 아직 전형적인 '숏테일' 산업에 머무르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술을 가진 직업정치인의 영향력이 가면 갈수록 커지고 세진다는 데 있다. 미국 워싱턴DC에서 로비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 '케이 스트리트(K-Street)'다. 로비스트들은 기업이나 이익집단을 고객으로 하면서 틈만 나면 정치인과 관료들을 구워삶는 걸 업으로 삼는다. 정치인은 이런 로비스트들의 접촉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일면 즐긴다. 자신들의 존재감을 강화시켜줄 뿐만 아니라 위법이 아닌 한에서 '갑'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은 로비스트마저 고용할 힘이 없는 서민들이다. 점점 서민의 목소리는 세를 잃어가고, 급기야 선거 때 정치인들이 쉽게 반짝 이벤트를 벌이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인들은 선거 때면 재래시장에서 정치 따위는 신경 쓸 틈도 없이 바쁜 서민의 손을 잡고 '서민 코스프레'를 한다.
정치와 비슷하게 낙후된 영역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언론이다. 누군가의 구린 점을 캘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사익(私益)을 취재라는 공익(公益)적 행위와 바꾸어 먹으려는 브로커형 기자들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지면 점점 더 다양해지는 독자들의 요구에 눈을 감는 것은 그만큼 쉬워진다. 그러다 보니 원하는 기사를 골라서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요구를 대신 충족시켜주는 포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게 되었고, 언론의 기사가 갖는 무게도 예전 같지 않다.
이런 일련의 변화가 초래한 더욱 큰 문제는 언론인들이 온갖 이권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단단한 마음가짐, 즉 자존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자존심의 추락은 고도 자본주의 시대를 버텨내기엔 너무도 가벼운 월급봉투 때문만은 아니다. 기자를 한낱 사주의 종업원 취급하는 풍토가 그들의 자존심을 흔든다.
그런데 정치와 언론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의외로 쉬워 보인다. 유권자와 독자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이 갖고자 하는 변화의 진정성을 살피고, 다독이고, 격려하고, 때로는 질책하면 된다. 최근 한국일보가 겪어야 했던 진통 역시 독자들의 관심과 질책으로 '힐링'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한국일보가 독자의 다양한 욕구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아주 새롭게 태어났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 정치도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키워온 자그마한 희망과 욕구들을 채워주는 방식으로 바뀌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