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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견뎌내게 하는 차분함

[나의 글/삶과 문화/2012.11.29.]

미국 뉴욕주의 한 주립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9년여 전의 일이다. 갑자기 지역 전체의 전기가 끊기는 일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먹고 마시고 씻는 일이 모두 불편해졌다. 인근 발전소의 고장으로 초래된 단전사태로 나를 포함한 수십만명이 고통을 당하게 됐다. 하루 이틀이면 해결될 줄 알았던 단전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고, 덕분에 난 미국의 맨얼굴을 잘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먼저 가장 두드러진 것은 평소보다 차량을 운전해 등교하는 시간이 짧아졌다는 점이다. 큰 사거리의 신호등이 대부분 고장나 있었는데, 오히려 운전하기가 수월하고 빨라졌다. 아무리 큰 사거리에서도 먼저 들어온 차가 먼저 지나간다는 선입선출의 원칙이 지켜진 덕분이었다. 먼저 들어온 차에게 나중에 들어온 차가 양보하고, 혹시 어느 쪽이 먼저왔는지 불분명하면 서로 눈짓과 손짓으로 조율하니 신호대기보다 더 짧은 시간에 많은 차가 사거리를 통과할 수 있었다. 


나는 신호등만이 능사가 아니고 일정한 룰만 따르면 오히려 더 교통 소통이 원활해 질 수 있는거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사거리 어느 한 쪽의 정체도 길어지지 않고 스스로 조절되는 아름다운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 일부 대형 마켓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도난사건에 대비해 무장한 경비요원을 배치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삼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보면, 계산대에서는 자체 발전기 덕분에 별무리없이 금전등록기를 이용한 결제를 마칠 수 있었으며 진열대에는 약하게나마 조명도 들어와서 쉽게 물건을 고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물이나 빵과 같은 필수 식료품을 결코 사재기하지 않았다. 아이가 많은 집은 좀 넉넉히 구입하고, 식구가 적은 경우에는 조금씩 구입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생필품을 나눠쓸 수 있었다. 단전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인근 주에서는 급한 물자를 피해지역에 집중 공급해서 평온함을 유지하는데 큰 몫을 했다.


그렇게 단전이라는 위기 상황은 모두가 차분함을 유지함으로써 조용히 극복되고 있었다. 모두가 위기라는걸 알면서도 가급적 패닉에 빠져 허둥대는 파국적 상황만큼은 막아보자는 암묵적 계약. 그런 계약이 작동하고 있음을 난 감지할 수 있었다.


미국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계약은 위기국면에서 흔히 모습을 드러낸다. 9ㆍ11 테러당시 구조작업에 참여했던 소방관이 비상구 계단을 내려오며 찍어온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구조 요원들에게 길을 내주고 벽쪽에 한줄로 서서 자신이 나갈 차례를 기다리던 비상구의 사람들. 비록 그들중 상당수는 무너져내린 빌딩에 깔렸을지언정, 구조작업을 통해 다른 누군가는 건물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모든 미국인이 다 질서를 존중하고 차례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뉴욕 맨해튼을 걷다보면, 작은 골목길의 신호등에 별로 개의치않고 무단횡단을 일삼는 '제이워커'들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일반 주택의 쓰레기 수거료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은 인근 아파트단지의 공동 쓰레기통에 몰래 자신의 쓰레기를 버리고 도망가기도 한다. 며칠전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날, 어느 백화점 앞에 몇시간 서 있던 나는 막상 문이 열리려 하자 많은 이들이 뒤에서부터 바짝 조여들어 그들에게 압사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다. 그 뿐인가. 1만명당 한 명꼴로 총기관련 사건 사고로 사망하는 미국의 모습도 결코 감출수 없는 치부이다.


그렇다면 '차분함'과 '일탈'이 공존하는 양면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미국은 지진, 화재, 허리케인같은 재난이 종종 발생하고 세계 곳곳의 무력분쟁에 개입하는 바람에 상시적으로 위기상황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쉽게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으며 묵묵히 함께 견뎌내는 차분함을 가진 그런 나라. 개인의 일탈도 그런 차분함에 기세를 잃는 나라. 내게는 미국이 그렇게 다가온다. 위기 상황만 생겼다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차분함'의 비결은 알 수 없지만, 이 커다란 나라를 든든히 뒷받침하는 일종의 관념적 토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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