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좋은생각 2013.5.]
서른이 넘어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은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다. 모아 놓은 유학 자금과 부모님이 주신 피 같은 돈이 떨어져 갈 즈음, 다른 주(州)로 출장을 가는 교수님이 드디어 내게 첫 강의 기회를 주었다. 만약 이번 수업을 무사히 잘 마치면 앞으로 강사로 일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나는 돈이 없어 유학을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귀국해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교수님이 준 지침은 한 가지였다. 사형제 폐지에 관한 비디오테이프를 틀어 주고, 학생들과 대화를 해 보라는 것이었다. 막막했다. 학생들이 강의실에 들어서고 나서도 한참동안 나는 단 한마디도 입을 떼지 못했다. 괜히 애꿎은 비디오테이프만 되감다가 급기야는 교수님이 틀어 주라고 정해 준 부분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테이프를 원 지점으로 감아 놓고 보니 어느덧 10분이 지나 있었다.
당황한 나는 잠시 머뭇대다가 “Hello, How are you today?(안녕? 오늘 기분이 어때요?)”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은 네 명의 여학생이 내 발음을 앵무새처럼 똑같이 흉내 내며 낄낄거렸다. 교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 순간, 나는 앞이 캄캄해졌다. 오직 그 강의실을 나가는 것만이 최선인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래, 여기서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다. 집에서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내와 뱃속의 아기를 생각해서 힘을 내보자!’하고 스스로 다짐한 뒤, 용기를 냈다.
다시 비디오를 틀어 놓고 “우리가 살고 있는 뉴욕 주에는 사형 제도가 잘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몇몇 학생들이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고, 토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진지해졌다.
드디어 50분의 강의가 끝날 즈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오늘 토론 너무 좋았어요. 다음 주에도 오실 건가요?” 한때 주한 미군으로 근무했다는 그 학생이 정말 토론을 원한건지 내게 용기를 주려고 한 건지 지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학생의 말에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늙다리 유학생의 첫 강의는 시작되었고, 그 후 난 미 하와이대 교수가 되었다. 내게 용기를 준 한 학생의 한 마디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나는 질책보다는 격려의 말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