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라 깨었다. 여기는 소파 위, 그것도 모퉁이다. 나는 허리춤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거실은 어질러져 있고, 생각해 보니 설거지 거리도 쌓여 있다. 시계는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다. 아이들은 잠들었고, H는 아직이다.
반사작용처럼 일어나 거실의 장난감이며 책들을 치운다. 다음으로는 주방이다. 설거지를 한다. 다 끝나도 H는 오지 않는다. 이제 한숨 자야 한다. H에게 삐삐를 친다. 8282를 남긴다. 이건 안전한 귀가에 대한 예의고, 의례이다. 별일 없이 귀가할 줄 알기 때문에 걱정은 안 한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돌봄 노동은 나의 몫이었다. 어린이집 버스를 태워 보내면 작은 아이는 골목이 떠나가라 울었다. 가방을 둘러메고 도서관으로 뛰어가는 뒤통수에 대고 골목길에 나와있던 동네 할머니들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저 어린것들을 떼어놓고. 쯧쯧쯧.”라고 한 마디씩 한다. 못 들은 척 뛰어가서 책을 펼치면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집에 가서 밥을 하고 어린이집 차를 기다리려면 4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이 귀한 시간, 내 시간.
4시가 되면 신데렐라가 되어 도서관을 뛰어나간다. 시장에서 장을 보고 집에 돌아가 시계를 보며 5분 단위로 음식을 준비한다. 5시 55분, 골목에 나가서 아이들을 맞이한다. 아이들을 안고,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고, 책을 읽어주고, 재운다. 옆에서 쪽잠을 잔다. 다시 눈을 뜬다. 새벽 2시, 이제부터 내 시간이다. 책을 펼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또 엄마로 돌아가야 하는 알람이 언제 울릴지 모른다. 그 시간까지는 한시적으로 나는 나다. 따로 또 같이, 내가 아이들의 인생을 대신 살지 않을 것이고, 아이들도 내 삶을 대신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건 아이가 아프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아이가 쓰러진 그날 이후,나는 오로지 환우 엄마였다. 24시간 중 23시간 30분은 환우 엄마였다. 아이가 아픈 것이 다 내 탓 같았다. 내가 좋은 엄마가 아니어서. 내가 나 살자고 미친년처럼 살아서. 내가 까칠해서 시어머니와 불화해서. 더 사랑해 주지 않아서. 그래서, 그래서 아픈 것 같았다.
자책은 길었고, 고통은 깊었다.
이제 직시하고, 직면할까 말까 한다. 이젠 내 나이 50대 중반, 별로 무서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나이다. 이번 생은 이쯤 살면 된다. 이대로 죽으면 내가, 우리가 지나온 지난 15년 10개월의 기록은 세상에 남지 않는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소아조현병 아이의 이야기, 아이와 함께 살아온 우리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세상에 꺼낼 때가 온 것 같다. 아니 꺼낼 힘이 생겼다는 것이 맞겠다. 이것이 내가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 이유다. 소아조현병에 대한 세상의 편견,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소아정신과 이야기, 질병에 대한 이야기, 우리를 거쳐간 의료진과 의료시스템 이야기, 정신장애 아이에게 힘들었던 학교 이야기, 인격과 질병의 경계가 모호한 정신질환에 대한 이야기, 아픈 아이의 동생으로 살아가는 이야기, 그 아빠의 이야기, 그 엄마 이야기, 우리가 살아낸 그 생존기, 그리고 아. 름. 다. 운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