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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Nov 10. 2023

4화 사랑의 계보

아버지와 아이 사이를 흘러 물결이 됩니다_feat 고명재 시인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출처_알라딘 서재


아버지 1주기에 이 책이 내게 와서 고맙습니다. 아버지를 보내고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어요.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지요. 이 책을 읽는 내내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그리고 이윤악, 나의 할머니. 굽은 등에 하얀 수건을 썼어요. 해가 좋은 우물가에서 갓 따온 굴을 톡톡 까서 내 입에 쏙 넣어주던 손이 기억나요. 또 장지예, 나의 할아버지. 잘 익은 무화과를 반으로 쪼개 내어주던 손, 잘 익은 홍시를 쪼개어 먹여주던 손이 기억나요. 그리고 한금선, 나의 시어머니. 내 생일날마다 잡채를 만들어주셨죠. 따듯하고 고소하고 달콤한 잡채, 그 탱탱하고 기다란 당면을 기억해요.


그래요. 나는 먼저 간 자들의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세포에 박혀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는데 아들, 아들이 무척 보고 싶네요. 아들은 할아버지의 아버지 이름은 장지예, 할아버지의 어머니 이름은 이윤악이죠라고 불쑥불쑥 물어요. 확인하는 거죠. 사랑의 계보를. 너는 과거를 살지 말고 미래를 살아야지, 무심한 나는 말했어요. 아이는 확인하고 싶었던 건데.


어제도 두 시간 동안 불안에 서성이다가 아이는 말했어요. 내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까 봐, 다른 우주에 똑같은 내가 있을까 봐 불안해요, 걱정할 거 없죠, 걱정할 거 없죠, 백번은 물어요.


아이는 자꾸 확인해요. 자신의 계보를. 엄마를 키워준 사람들을. 사랑의 족보를. 이 지구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을 확인하려고.


"비와 눈과 사람은 사라지는 것, 그렇게 사라지며 강하게 남아 있는 것, 남아서 쓰는 것, 가슴을 쏟는 것, 열고 사는 것, 무력하지만 무력한 채로 향기로운 것, 그렇게 행과 행 사이를 날아가는 것"(253쪽)*


아버지는 사라졌지만 내게 남아있습니다. 이제 나는 가슴을 쏟아 아이를 사랑하겠습니다. 나로 향기롭게 살겠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이 사이를 날아가는 것. 사랑은 그렇게 흐릅니다. 물결이 됩니다.


*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난다, 2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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