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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Dec 18. 2023

16. 말할 용기, 보여질 용기

아이리스 매리언 영, <차이의 정치와 정의>를 읽고

말할 용기, 보여질 용기_차이의 정치와 정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고?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봐라. 그 말이 나오는가.”

퇴원한 아버지 뵙고 돌아서는 길, 아버지 보호자 41년생 영자 씨는 이렇게 말했다. 2022년 4월 9일,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온천천을 걸어오던 길이었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하 '영'으로 호칭)은 구조적 억압은 일상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미디어와 문화의 상투적 관념 속에서, 관료제 위계 체제와 시장 질서 속에서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지니는 이런저런 생각과 반응에서 야기된 결과물 때문에 겪는 극심한 부정의(108쪽)라고 했다. “대한민국에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과연 한국 사회에 구조적인 성차별이 없는가?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가? 몇몇 엘리트 여성들이 전문직에 진출하고, 여성의 대학입학률이 남성보다 높다고 해서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여성의 임금은 여전히 남성의 65%에 머물고 있고, 디지털 성폭력을 비롯한 각종 범죄의 피해자로 노출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성폭력 발생 건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사회가 대한민국이며, 일하는 여성과 전업주부의 가사노동 시간이 근소한 차이밖에 나지 않는 사회이며(일하는 여성은 슈퍼우먼이 되라는 신호), 아이가 아파도, 배우자가 아파도, 부모가 아파도 가족을 돌보는 이는 여성인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보이지 않는 노동,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에 여성들은 오늘도 열심히 부역하고 있다. 그런데 구조적인 성차별이 없다고?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팔십 평생을 살아온 영자 씨는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억압을 영은 착취, 주변화, 무력함, 문화제국주의, 체계적 폭력으로 나눈다(2장), 한국사회에서 여성과 장애인은 이 구분 틀에서 볼 때 중첩적인 억압 구조를 가진다. 노동을 하지만 임금을 받지 못한다는 점 또는 노동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착취에 해당하면서, 중요 의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사소한 의제가 된다는 점에서 주변화되고, 의회 진출이나 고위 공직자 비율에서 볼 때 권한이나 권력을 가지지 못하는 점에서 무력화되어 있고, 지배집단의 경험과 문화를 보편화하고 유일한 규범으로 확립하는 비장애인, 이성애 남성에 의한 사회적 규범 안에서 문화제국주의의 지배에 놓이는 점에서_이것의 대표적인 사례로 대중교통 이동이 누구를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될 것이다_ 그리고 여성에 대한 폭력(가정 폭력, 성폭력, 디지털 폭력 등)과 장애인에 대한 모욕과 멸시가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이 억압에서 해방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차이를 가진 집단들이 참여하는 공중(the civic public), 이질적 공중 안에서 그 개별적인 특수성을 통해 정의는 표현될 수 있다고 했다. 즉 정의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조건을 지정한다(268쪽)고 했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중요한 실천이다.

 

그리고 아브젝시옹(abjection), 즉 추함과 혐오에 대한 부지불식의 무의식적인 판단에 의해 구조화되기(317쪽)때문에, 안정 체계에 위협을 느끼고 경계 불안이 생기기 때문에, 문화적 제국주의화된 집단의 구성원들은 특권 집단과는 다른 주체성의 삶, 취약하고 복수적 주체성을 가진 분리된 자아를 경험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모든 주체가 스스로를 복수적이고 가변적이고 이질적인 존재임을 이해하는 것이 이 혐오에서, 억압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했다(323쪽).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복수적이고, 가변적이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성찰하는 것이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라면 말이다.


나는 다양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자리와 모임에 따라 나를 소개하는 방식이 다르고, 나를 부르는 호칭도 다르다. 나는 여성이며, 이성애자에 가깝고, 지방 출신이지만 서울에 살고 있고, 장애가 있는 청년의 보호자이며, 페미니스트이며, 또또 많은 정체성이 있다. 어떤 위치성을 가지는가에 따라 나는, 나의 자아는 구성된다. 이때 나의 정체성은, 나의 정치는 이 사회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개인 정체성의 차원이 아니라 집단의 차이는 무엇인가? 집단 간 차이는 집단 속성의 표현이 아니라, 제도 내에서 집단들이 맺은 관계의 함수, 그리고 제도 내에서 집단들이 상호작용한 것의 함수이다(369쪽). 차이의 의미는 맥락화되며, 집단 간의 차이는 비교되는 집단들에 따라, 비교의 목적에 따라, 비교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더 두드러지거나 덜 두드러질 것이다(369쪽). 차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 작용, 사람과 제도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창출된다. 차이는 사람들 개인의 내적 속성이 아니라 관계의 내적 속성이다(381쪽).

 

영은 피억압 집단이 억압의 사회적 조건을 정의하고 분명히 표현하는 과정, 그리고 특유한 집단 경험을 폄하하고 침묵시켜 왔던 문화제국주의와 대면하면서 문화를 정치화하는 과정은 억압과 직면하고 억압을 감소시키는데 필수적이고 결정적이라고 했다(333쪽). 그리고 의식고양 전략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는 협력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동기를 가지게 된다(336쪽). 문화제국주의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긍정적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복지나 치료적 조치보다 중요하며, 이것이 차이의 정치와 사회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민주적 공중(democratic public) 내 집단의 차이를 인정하고 집단 간 차이를 분명히 표현하는 것이 특권 집단의 관점과 이익이 지배적이 되는 편향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394쪽)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은 ‘집단 대표제(group representation)’를 주장했다. 구성원이 스스로 조직하고, 집단의 관점을 고려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제도화 환경에서, 특정 정책을 해당 집단이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제도적 메커니즘을 가진 제도 말이다. 이런 제도가 있으면 참 좋겠다. 그녀는 이것이 반드시 비례대표제를 함의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나는 한국사회 정치 현실에서 자꾸 비례대표제가 떠오르고, 비례대표제에 대한 많은 비판이 연이어 떠올랐다.

 

영이 제시한 집단의 사회적 평등, 집단 간 차이의 상호 승인과 긍정을 통한 문화제국주의가 약화될 것이라는 희망에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현실 정치에서 어떻게 적용 가능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 대신 시 한 편을 옮긴다. 말하고, 보여지는 것이 희망이라고, 그것이 억압에서 해방되는 길이라고 말하는 를. 영자 씨에게도 이 시를 읽어줘야지. 소리 내어, 또박또박.





 

보여질 용기*

                                                                                                                  정 혜 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톰 행크스는 감옥의 죄수를 위해 모차르트의 아리아를 틀었다고 해요

“우리 오늘 저녁에 만날까?”같은 구절이 있다고 해요

상상만 해도 꿈결같이 달콤한 멜로디가 떠오르네요

나는 오페라를 본 적이 없지만

모차르트가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음악을 연주했다는 것은 알아요

그때 과수원의 오렌지를 몰래 따먹은 일도 있다지요

향기 때문이에요

 

그래요

모차르트도 마차를 탔잖아요

 

우리를 불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쩌면 그분들은 침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을지 몰라요

그분들은 침묵당해 본 적이 없고

스스로 침묵을 택한 적이 없을지 몰라요

어쩌면 그분들은 숨 막혀 본 적도 없을지 몰라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다니 정말 놀라워요.

그분들은 천사일지도 몰라요

저는

우리의 슬픔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천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슬퍼요

 

우리는 오랫동안 소문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저 집 딸이 장애래. 저 집 아들이 성치 않대.

하지만 나는 존재해요

나는 진짜 장애인이에요

나에게 일어난 일은 다 진짜예요

장애로 사는 일의 세부사항이 파도처럼 매일 다가와요.

 

하지만 지금

나는 내 경험의 중심에서 말하는 중이에요

나는 내 삶을 소중히 여기고

내 자아는 용기 속에 발전하는 중이에요

 

우리 인간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을 한 사람을 상상하기 마련이지 않나요?

우리 가슴을 사랑과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게 할 사람을,

장차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니게 될 사람을요

 

당신은 어떤가요

그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나요

 

당신이 나에게

조금만 귀 기울이면

내가 무가치하다는 확신을 어떻게 뚫고 나오려고 하는지

자기 연민의 늪을 어떻게 헤치고 나오는 중인지

들을 수 있을 거예요

 

나에게 당신의 진짜 경험을

진짜 외로움을

진짜 두려움을 말해주세요

나는 들을 거예요

 

당신의 적은 내가 아니에요

나의 적도 당신이 아니에요

혐오-그게 바로 우리의 적이니까요

혐오가 우리를 나날이 약해지게 하니까요

 

* 2023년 12월 13일, 혜화동 <어쩌다 산책> 서점 북토크에서 정혜윤 PD가 낭송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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