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센티미터의 태산, 입춘 뒤에 숨은 겨울

당신의 봄을 저장합니다 [시와 에세이]

by 장지연 작가


당신의 봄을 저장합니다


고향 안산 저편으로 곧 봄이 당도할 텐데
당신은 어느 계절의 끝에 멈춰 있나요

사그라들어 끝내 닿을 수 없는 기척

당신은 영원히 시린 나의 첫사랑


지워져 가는 기억의 깊이만큼 차오른

당신을 향한 앓이와 고픔

다 갚지 못한 사랑의 부채는

마음속에 빗장을 걸어,

당신을 봄이라 써서 봉인합니다


요양병원 침대 위로

낮의 길이 따라 길게 누운 당신의 그림자

꿈처럼 다녀간 후는 언제나 밤, 언제나 겨울

그 어둠의 무게에 밀려 나는 다시 허물어집니다


꽃이 피어도 봄을 읽지 못하는

당신의 정지된 눈동자 속에서

나는 첫사랑과의 이별을 예감합니다

다시는 껴안고 입 맞추지 못할 당신의 봄을

차마 젖은 눈으로 덮어둡니다


좋아하시던 붉은 동백 지고 나면

고사리, 취나물 돋아날 가는고지 언덕도

봄 내음 같던 당신을 그리워하겠지요


사무친 그리움, 그 너머가 다 사랑입니다



[행간의 온도]



입춘 뒤에 숨은 겨울

절기는 어김없이 찾아와 입춘이라 떠들어 대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마음의 외투를 벗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봄은 화려한 개화의 소식이겠지만, 어떤 이에게 봄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요양병원의 좁은 침상 위, 길어지는 햇살의 각도만큼이나 깊게 드리워진 노모의 그림자를 응시하는 일. 그것이 누군가가 마주한 봄의 실체다.


한 뼘 문턱이 만든 태산

여든여덟, 생의 무게를 지탱하던 근육은 이미 허물어져 있었다. 불과 십 센티미터. 화장실의 낮은 문턱은 노인에게 태산보다 높은 절벽이었다. 그 사소한 경계를 넘지 못해 무너진 몸은 허리와 갈비뼈에 깊은 금을 남겼고, 결국 두 발로 대지를 딛는 법을 잊게 했다. 반복되는 사고 끝에 집이라는 안식처는 더는 허용되지 않았고, 삶의 궤적은 요양병원이라는 낯선 공간으로 옮겨졌다.

평생의 손때가 묻은 방과 작별한 후, 노모의 시간은 정지했다. 기억의 저장소, 해마는 더 이상 새로운 생의 기록을 허락하지 않았다, 약해진 육신은 직립보행의 자유를 거두어 갔다. 희미해지는 눈동자 속에 갇힌 계절은 아마도 영원히 녹지 않는 겨울일지 모른다. 다시는 봄을 온전히 껴안을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할 때마다, 자식은 마음속으로 '어머니'라는 이름을 '봄'이라고 저장해 본다.


갚을 길 없는 사랑, 그 영원한 부채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은 생의 끝까지 상환할 수 없는 고귀한 부채다. 시간은 야속하게 흐르고, 마음에 깊게 파인 그리움은 상사(相思)의 병이 된다. 이를 누군가는 이루지 못한 애틋한 '첫사랑'이라 정의할지도 모른다. 꽃이 피어도 계절을 알아보지 못하는 정지된 시간 곁에서, 역설적으로 자식은 가장 뜨겁고도 아픈 봄을 살아낸다. 붉은 동백이 지고 나면 찾아올 그 공허한 언덕조차 이제는 사랑이 머물러야 할 영역임을 깨닫는다.

머지않아 어느 언덕에 돋아날 취나물 향기 속에서, 쑥 고개 내밀 고사리의 솜털에서 우리는 즐길 수 없는 이의 기척을 다시 읽어내려 애쓸 것이다. 야위어가는 기억 대신, 가슴속에 그 존재를 영원한 '봄'으로 봉인해 두는 수밖에 없다. 세월이라는 비정한 틈바구니와 사랑이라는 가느다란 틈 사이, 그곳에 우리 모두의 아픈 시 한 줄이 끼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