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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숙 Jun 21. 2020

스토커가 건넨 장문의 손편지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 헐 뭐야? 귀찮게 하네.

- 왜 자꾸 그러는 거야, 짜증 나게.

- 무섭다.. 최대한 피하는 게 좋겠어.



지금은 그저 조각된 사진과도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당시 몇 개월에 걸쳐 겪었던 감정은 대략 이런 순이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1년 반 정도의 기나긴 휴학을 마치고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이미 동성친구들은 졸업반이다 취업이다 뭐다 해서 학교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거의 혼자 수업을 들으러 가거나 군 제대를 마치고 돌아온 같은 동기의 남사친들, 혹은 후배들과 종종 같이 다니곤 했었다.


자주 수업을 들으러 다녔던 강의실 건물에서 우연히 친한 선배 하나를 만났다. 약간의 농담 섞인 말이 오고 간 후,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근데,
저기에 누가 너 쳐다보고 있는 것 같더라.






- 누가? 나를 왜 봐? 라며 고개를 돌리고 두리번거리자 학교 건물 모퉁이 쪽에서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눈에 띄었다.


하얗디 하얀 얼굴, 마르고 작은 체구, 불안해 보이는 눈빛.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 선배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 오빠, 내가 아니라 여기 지나다니는 사람 다 쳐다보는 것 같은데~?



그 이후로 그 수업 시간이 끝날 때마다 정체 모를 그 사람은 주변을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가 이 건물에서 수업을 듣기는 하는 건지 의심이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혼자 수업을 듣거나 밥을 먹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고 애썼다. 








며칠이 지났을까. 특별한 액션 없이 그렇게 쳐다만 보는 것에 대해서 나도 무덤덤해지고 있을 때쯤이었다. 후배랑 밥을 먹으러 강의실 건물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저기요..




정체 모를 그 사람이었다. 그때 봤던 불안한 눈빛, 하얗디 하얀 얼굴과 같이 보이는 하얀 손목. 그의 손에서 무언가를 천천히 내미는 게 보였다. 막상 눈을 마주치니 고개를 떨구고 시선을 피하기만 하던 그가 조심스레 건네준 것은 의외로 아기자기한 편지봉투였다. 이걸 받아야 될까 말아야 될까를 잠깐 고민했지만, 잔뜩 주눅들어보이는 그의 모습에 왠지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고 말없이 봉투를 받게 되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학교 후문의 도시락집에서 점심으로 치킨마요를 깨작깨작 떠먹으며 편지를 꺼내 읽었던 그때가.

사실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고 약간은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후배에게 티 내지 않기 위해 조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직 다 못 먹은 밥을 꼭꼭 씹으며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가 건넨 편지봉투 안에는 2장에 걸친 장문의 편지지에 빼곡하게 손으로 직접 적은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본인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어떤 수업을 듣고 있고 무슨 전공인지, '나는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이름, 전화번호, 연락을 달라.라는 식의 내용까지, 한마디로 구구절절했다. 악의는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전공을 확인하자, 내가 듣는 강의실 건물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던 학과 건물이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을 뿐이다.



나는 그 당시에 누군가에게 이렇게 나 자신을 정확하게 글로 풀어서 쓸 수 있었을까.



'이 분도 참 지극정성이다.. 와..' 놀라고 있던 나에게 옆에 있던 동생이 '누나, 그래도 당분간 좀 조심해'라며 내가 느꼈던 그 불안한 눈빛을 자신도 똑같이 느꼈다고 말해주었다.








기억에서 조금씩 잊힐 때쯤, 그는 또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자꾸만 주변을 맴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찝찝했다. 예감이 좋지 않아 서둘러 집으로 가는 스쿨버스를 타러 갔고, 다행히 마침 자리가 있어 앉은 뒤에야 마음이 놓였다.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은 지 몇 분쯤 흘렀을까.


옆에서 누가 어깨를 툭툭 쳤다. '뭐지?' 하고 본 순간, 그 남자가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너무나 황당한 나는 잠시 어떤 사고도 일시 정지된 채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다.




5분만 저랑 이야기해요. 네?





사실 한 번은 선배 한 명이 먼저 나서서 그 남자에게 한마디 하기도 했었는데, 집으로 가려는 스쿨버스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


- 죄송한데,, 좀 가주실래요?


정중하게 얘기했고,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아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조용히 일어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때는 정말 간 줄 알았다. 한참을 달려 집 근처에 도착한 후에, 스쿨버스에서 내리는데, 뒤에서 그 남자가 따라 내릴 때의 소름은 아직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는 가지 않았다. 



결국, 내린 그 버스정류장에서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연 많아 보이는 표정이 담겨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때 당시는 최대한 피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할 이야기 없다며 돌아가시라는 말을 몇번이고 반복했다. 울먹거리며 말하던 그는 그제서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은 나를 더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 후로 학교에서도 어디에서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꽤나 오래된 일이지만 가끔 생각난다.

그때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5분 만을 외치던 그 남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을까. 무척이나 간절해보이긴 했다. 내가 그 당시 두려움을 떨쳐내고 그가 하는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들어줬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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