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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숙 Aug 15. 2020

'행복추구권'이라 쓰고 '행복발견권'이라 읽는다

헌법 제10조를 읽으며




OO 씨의 눈에서 야망이 느껴졌어요.




좋아하는 작곡가님의 음악회에 초대를 받고 대화를 나누다 들은 한마디였다. ‘네...?’ 하고 흠칫 한 순간 문득 10년 전 공무원이 되겠다며 호기롭게 학원부터 등록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 다녔던 고시학원의 영어 선생님은 내 영어 독해 노트 제일 앞면에 다음과 같은 문장 하나를 적어주셨다.



- Boys, be ambitious!



하루 종일 흙빛의 동태눈을 하고 거울도 외면할 다크서클이 중력에 못 이긴 채, 독서실 구석에 앉아 열몇 시간을 공부만 했었다.  그렇게 1년 반 이상의 시간을 보냈던 나에게 학원 선생님이 강조했던 그 ‘야망’이란 두 글자는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냥 그때가 생각났다.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과 불안감이 머릿속을 지배했던 그때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행복할 거야. 내 미래는 보장될 거야. 안정된 삶을 살게 되면 행복하겠지.



학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보던 모의고사 점수에 일희일비하며 웃고 울었다. 영어점수가 늘 제자리걸음인 게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는 영어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하면서 또 격한 감정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지금의 내가 느끼는 이 괴로움과 고통 따위의 순간들이 쌓여 훗날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고.


결과에 지나치게 연연하면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 조급함이 생긴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정의 내버린다.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지금 이런 감정 따위에 동요되지 않겠다고.


결국 나는 시험을 준비하면서 대인기피와 우울감을 겪었고,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것에 정신적인 한계에 부딪혔다. 그 때문에 한동안 칩거했다. 괴로움과 조급함이라는 것은 사실 '무서운 습관'과도 같았음을 지독했던 공무원 공부를 끝내고 수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어찌 됐건 작곡가님이 내게 전해 준 '야망'이 넘치는 눈빛으로 보였다는 건, 삶을 대하는 태도가 희망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헌법 제10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나는 이 문장에서 단어 하나를 바꾸고 싶다. 사실 ‘추구’라는 것은 사전적 의미로 말하자면, ‘목적을 이룰 때까지 뒤쫓아 구한다.’라는 뜻이다. 행복이라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현실에서 찾아오는 인내와 고난을 정당화하고 싶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실 행복이라는 건,
추구하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게 아닐까



우연히 올려다본 맑은 하늘,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 미세먼지 걷힌 맑은 공기, 장마가 끝난 후 동그란 빗방울이 잠시 머물고 있는 잎사귀들, 멀리서 온 손님처럼 반가운 한여름날의 바람. 알고 보면 우리와 늘 함께 하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행복'이라는 게 사실은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확신마저 들게 만든다.


기나긴 코로나로 인해 지난날이 문득 그리워질 때 일상의 행복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이제와서야 그때의 행복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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