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정숙 Aug 15. 2020

'행복추구권'이라 쓰고 '행복발견권'이라 읽는다

헌법 제10조를 읽으며




OO 씨의 눈에서 야망이 느껴졌어요.




좋아하는 작곡가님의 음악회에 초대를 받고 대화를 나누다 들은 한마디였다. ‘네...?’ 하고 흠칫 한 순간 문득 10년 전 공무원이 되겠다며 호기롭게 학원부터 등록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 다녔던 고시학원의 영어 선생님은 내 영어 독해 노트 제일 앞면에 다음과 같은 문장 하나를 적어주셨다.



- Boys, be ambitious!



하루 종일 흙빛의 동태눈을 하고 거울도 외면할 다크서클이 중력에 못 이긴 채, 독서실 구석에 앉아 열몇 시간을 공부만 했었다.  그렇게 1년 반 이상의 시간을 보냈던 나에게 학원 선생님이 강조했던 그 ‘야망’이란 두 글자는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냥 그때가 생각났다.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과 불안감이 머릿속을 지배했던 그때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행복할 거야. 내 미래는 보장될 거야. 안정된 삶을 살게 되면 행복하겠지.



학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보던 모의고사 점수에 일희일비하며 웃고 울었다. 영어점수가 늘 제자리걸음인 게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는 영어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하면서 또 격한 감정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지금의 내가 느끼는 이 괴로움과 고통 따위의 순간들이 쌓여 훗날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고.


결과에 지나치게 연연하면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 조급함이 생긴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정의 내버린다.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지금 이런 감정 따위에 동요되지 않겠다고.


결국 나는 시험을 준비하면서 대인기피와 우울감을 겪었고,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것에 정신적인 한계에 부딪혔다. 그 때문에 한동안 칩거했다. 괴로움과 조급함이라는 것은 사실 '무서운 습관'과도 같았음을 지독했던 공무원 공부를 끝내고 수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어찌 됐건 작곡가님이 내게 전해 준 '야망'이 넘치는 눈빛으로 보였다는 건, 삶을 대하는 태도가 희망으로 가득하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헌법 제10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나는 이 문장에서 단어 하나를 바꾸고 싶다. 사실 ‘추구’라는 것은 사전적 의미로 말하자면, ‘목적을 이룰 때까지 뒤쫓아 구한다.’라는 뜻이다. 행복이라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현실에서 찾아오는 인내와 고난을 정당화하고 싶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실 행복이라는 건,
추구하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게 아닐까



우연히 올려다본 맑은 하늘,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 미세먼지 걷힌 맑은 공기, 장마가 끝난 후 동그란 빗방울이 잠시 머물고 있는 잎사귀들, 멀리서 온 손님처럼 반가운 한여름날의 바람. 알고 보면 우리와 늘 함께 하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행복'이라는 게 사실은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확신마저 들게 만든다.


기나긴 코로나로 인해 지난날이 문득 그리워질 때 일상의 행복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이제와서야 그때의 행복을 추억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라클모닝 6개월차, 슬럼프가 찾아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