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써 노력하지 마세요.
- 저, 정숙님.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마시고 간단하게 적어주세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의사선생님과 상담하면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설문지를 꼼꼼히 체크하고 써내려가면서 자꾸만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건 왜때문일까.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행여나 까먹고 다 전하지 못할까 싶었다. 이번 기회에는 꼭 속마음 다 털어놓고 나오리라.
지난 달인 8월 초, 마음의 병이 자꾸만 깊어지는 것 같아 결국 병원 예약을 했다. 예전엔 정신과로 불렸지만 지금은 '정신건강의학과'로 명칭이 바뀐 그 유명하다는 병원은 평일 오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사람이 많았다. 대기실에 앉아 상담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자니 연령층이 참 다양했다. 앳돼 보이는 여학생, 그리고 이제 걸음마를 갓 뗀 것 같은 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 건장한 체격의 남성, 50대 중년으로 보이는 어느 아주머니 등등.
각기 다른 사연을 안고 있을 테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고 느낀 공통점은..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타인과의 시선을 되도록이면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과 무미건조한 표정이 깊은 적막감을 더했다. 그저 어디선가 들려오는 전화 통화 소리와 접수창구 직원들의 목소리뿐. 간간이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그냥 왠지 숨이 막혔다. 설문지를 받아들고 적으면서도 눈물이 났고, 기다리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생각하면서도 또 눈물이 났다. 나는 아무래도 눈물샘이 고장이 난 듯했다. 뜬금없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배우였다면 눈물 연기 하나는 엄청 잘하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말도 안 되지만 우울한 감정에 매몰되지 않게 이런 식으로 별의별 상상력을 동원해 보았다.
설문지를 작성하고 나면 병원 코디네이터라는 분이 내가 적어놓은 증상에 맞게 여러 체크리스트 종이를 건네주신다. 상담을 기다리는 시간은 40분 정도 걸렸고, 내 이름을 호명하자 심호흡 한 번 하고 노크를 하며 상담실에 들어갔다.
- 안녕하세요, 정숙님. 어서 오세요.
선한 인상으로 맞아주시는 의사선생님은 내가 체크한 항목들을 확인하면서 조금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 제가 정숙님이 체크한 것들을 쭉- 봤는데요. 흠.. 우울 수치에 비해 자살 수치가 높게 나왔네요.
보통의 경우 우울 수치가 50 정도라면 자살 수치가 20-30 정도여야 하는데, 자살 수치도 우울 수치와 거의 비슷하게 나왔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 같은 경우 정확한 수치는 말해주지 않으셨고, 그냥 높게 나왔다고만 했다.) 이런 경우는 아무래도 우울감이 꽤 오랫동안 조금씩 조금씩 커져왔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 혹시 저녁에 잠은 잘 주무시나요?
- 아뇨. 두-세 시간마다 한 번씩 깨고 잠을 푹 못 자니까 피로가 쌓이는 것 같아요.
의사선생님은 수면의 질이 불안감을 더 키운다며, 잘 자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다. 잠을 잘 자는 일이 갑자기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일단은 규칙적인 식사부터 먼저 해야 했다.
올해 버킷리스트였던 바디프로필 촬영을 4월에 끝내고 운동을 쉬면서 일하는 중간중간 대충 끼니를 때운 게 화근이었을까.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현재의 상황에서 지독한 무력감이 일었다. 누워는 있지만 잠이 오지 않았고, 잠은 오지 않지만 그렇다고 움직이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매일 밤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계획들만 의미 없이 적다가 나도 모르게 적은 글자.
'나 좀 살려주세요.'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법륜스님의 영상과 글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정말 지독하다. 쉬 떨쳐지지 않는 그놈의 우울감..
-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써 노력하지 마세요, 정숙님. 우선 아무 생각도 안 해보는 거에요. 그리고 입맛이 없더라도 잘 챙겨드세요.
어떤 치료를 원하느냐는 의사선생님의 물음에 '필요하면 약물치료를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 약물치료라고 하는 게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것이라고 들으니 부작용이 생기진 않을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그건 미루기로 하고 일단 수면에 좋은 영양제와 우울증을 완화시켜주는 영양제를 추천해 주셨다. 시중에서 파는 영양제이니 쉽게 구입할 수 있을 거라며.
30분 정도의 상담이 거의 끝나갈 때쯤 의사선생님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언제든지 와서 저랑 이야기해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한마디가 굉장히 감사했지만, 아직까지 다시 병원엘 가진 않았다.
그때 추천받은 영양제를 지금까지 꾸준히 먹고 있고, 친구의 추천으로 주말이면 요가 원데이 클래스를 들으러 다녔으며, 추석 시즌으로 부모님 일을 도와드리면서 바쁘게 지냈다. 그리고 택배사와 계약을 해지하고 사무실을 새로 얻었다. 일하는 공간과 쉬는 공간을 철저히 분리하기로 했다. 택배 기사님과 자주 화이팅 외쳤었는데.. 죄송하기도 하다.
다시 하나씩 하고 싶은 일이 생기는 요즘이다. 삶의 활기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살아가면서 어느 것을 우선순위로 두며 사느냐에 따라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만 그래도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잘 자고 잘 먹는 것' 이 선행되어야겠다.
힘든 시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타인의 도움을 받았으니 나또한 누군가에게 이 글로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