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말하기 좋은 최적의 타이밍을 찾기란.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동안 미루고 미뤄왔던 퇴사 통보를 쿨하게 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막상 그때가 되자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게 되었다.
퇴사를 말하기 좋은 최적의 타이밍을 찾기란.
이 말을 꺼내려고 몇 번의 눈치를 살폈다.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상사가 외근을 나가서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안 들어오기도 하고, 이야기를 또 하려고 하면 이번 달은 아마 바쁠 것 같다며 아침 회의를 오랜 시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눈치만 보다가 결국 퇴사의 '퇴'자도 못 꺼내는 거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회사가 바빠도 나 없이도 잘만 굴러가는 것이 회사. 조직이라는 것을.
사실 이번이 퇴사가 처음은 당연히 아니다.
수능 끝나고 시작한 몇 번의 알바를 제외하고 제대로 직원으로서의 역할로 입사를 하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난 직후, 내 나이 20대 중반 때였다.
중소기업 청년인턴제도로 정직원 전환형 자리가 나서 들어갔던 곳이었다. 그 회사는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갖가지 재료들을 시험하고 연구하는 일을 주로 했었고, 나는 그 일을 총괄하는 총무팀 경리의 사무보조 자리였다.
처음으로 사무실에 하루 종일 앉아 엑셀을 두들기면서 수식을 걸고 자료를 정리하고 거래처의 전화를 받고 커피를 타고 늘 그 업무가 반복되었다.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쌓아둔 걸로 보이는 고대 문서처럼 낡은 서류 뭉치들을 순서대로 정리하는 그런 일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한 일주일 정도 다니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때, 같이 일하며 텃세를 부리셨던 그 40대의 여사수는 내게 말했다.
- 혹시 결혼하고 그만두려면, 그전에 그만둬.
그 사수의 말인즉슨, 결혼하면서 축의금이며 뭐며 받을 건 다 받고 신혼여행 다녀와서 몇 달도 되지 않아 그만두는 사람을 많이 만나봤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험담하기 시작했고, 이제 대학을 졸업한 갓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벌써부터 그런 기막힌 충고를 들어야 했다.
'그 받을 거 다 받았다는 사람들도 그렇게 받기 전에, 그만큼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않았을까. 솔직히 이런 건 양쪽 입장을 들어봐야 정확히 아는 거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첫 번째 입사했던 그곳을 다닌 지 한 달 만에 퇴사 통보를 했다.
어김없이 그날도 엑셀로 자료 정리를 영혼 없이 하고 있었고, 예기치 않게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던 날.
갑자기 그 사수가 사무실에 사무용품이 다 떨어졌으니 문구점에 다녀오라며 카드를 건네주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던 문구점이었다. 급하게 우산을 찾기 시작했고, 그나마 회사에 남아있던 우산은 금방이라도 부러질듯한 자태로 힘없이 벽에 기대어 있었다.
폭우에 맞서 씩씩하게 문구점을 다녀왔지만 이미 비바람에 몸도 마음도 축축해져 있는 상태였고, 뺨은 시리듯 발개져있었다.
그때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지..?
그때 맞았던 비바람이 나의 내면까지 흘러들어와 정신을 단단히 차리게 해주지 않았나 싶다. 그 여사수가 폭우 속으로 나를 밀어 넣지 않았더라면, 나를 내키지 않아 하는 듯한 표정을 애써 모른 체했더라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간은 더 영혼 없이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감사한 일.
그 이후로 조금 더 규모가 있는 기업으로 들어가 회계팀에서 회사 생활을 3년 정도 하고, 나와서는 다른 업종의 첫 스타트 기업인 회계팀으로 6개월 정도를 근무하다가 또다시 퇴사를 하고 보니 20대가 끝나가 있었다.
올해의 퇴사가 30대가 된 후 첫 퇴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