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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May 03. 2016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05)

남태령에 전해오는 사연들


남태령에 전해오는 사연들


남태령 우측상단에 관음사 위치가 표시된 옛지도

남태령(南泰嶺)은 서울 사당동에서 경기도 과천(果川)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이다. 옛적에 한강 나룻배를 타고 노들나루에 이르러 상도동 마냥고개(萬安峴)와 금불고개를 넘으면 배나무고을로 들어서는 배물다리(梨水橋)가 있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향하면 관음사(觀音寺)가 있는 승방평(僧房坪: 사당동) 고을에 이르고 다시 몇 리(里)를 더 내려가면 큰 고개가 나타나는데 이 고갯길이 남태령이다. 183m 고개 남태령을 올라서면 과천8경 중 하나로 불리는 망루가 솟아있다. 과천루(南嶺望樓)는 관악산과 우면산을 이어주는 고개에서 과천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남태령 옛길은 과천향방인 좌측 우면산자락의 망루에서 시작되는 삼남길로 그 흔적은 1km 정도만 되짚어 볼 수 있을 뿐이다. 남태령 옛길은 경사가 급하지 않아 푸르른 수풀이 우거지면 제법 호젓한 분위기를 느끼며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길이다.


▷ 산적이 출몰하던 여우고개



역사상 남태령은 한양과 삼남지역(충청, 전라, 경상도)을 잇는 유일한 양방(兩方) 길이기에 과거길 가던 선비들의 관문으로 이용되어 고개입구인 과천현 관문리(官門洞)에만 도착해도 한양에 이르렀다는 안도감과 감격이 함께한 길이었지만, 상하경(上下京) 길 과객(過客)들에게는 많은 사연을 남기게 한 길목이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큰 벼슬을 했던 양반이 관직에서 물러나 과천에 살고 있었는데, 이곳을 지나는 관리들에게 인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를 어길 경우 임금에게 무례한 자임을 보고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관리들은 앞 다투어 그에게 인사를 올렸는데, 인사 행렬이 늘어지자 과천에서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인근에 주막이 성업(盛業)을 이뤘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한양 올라가려면 과천부터 긴다.”는 옛말이 생겨났다고 전하고 있다. 남태령은 삼남길로 이어지는 각 지방의 특산물이 오가던 고갯길이요, 벼슬길에 오르고자 짚신꾸러미를 매고 인근에서 여독을 풀고 봇짐을 정비했던 길이기도 했다. 


또한 벼슬에 오른 벼슬아치들의 지방관리 부임길이 되기도 하고 쓸쓸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유배길이기도 하였다. 그 옛날 남태령을 넘던 삼남로(三南路)는 일제강점기에 설치한 경수국도와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퇴색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졌으나 최근 삼남로 옛길이 복원됨에 따라 향촌유적의 정취와 나그네들의 애환을 느껴볼 수 있게 됐다. 


서울 관악구와 과천시 경계인 관악산과 서초구 우면산을 연결하는 남태령은 수목이 울창해 양쪽 산을 넘나드는 여우가 많이 출몰해 “여우고개”(호현:狐峴)로 불렸는데 옛날에 이 고개에 천년 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변신코자 소의 탈을 만들어 무를 먹고 탈을 벗은 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홀렸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출처: 사진작가/ 임성환]

또 다른 설화(說話)에 의하면 고려조 공신이자 명장이었던 강감찬 장군(落星垈 출생)이 고개를 넘다가 여우들의 장난이 너무 심하여 크게 꾸짖으며 “너희 여우들이 또다시 이 고개에 나타나게 되면 네 족속은 모조리 멸족될 줄 알거라.”라고 호령한 뒤에는 여우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하여 “여우고개”로 불렸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또한 과거보러 가던 시골선비나 과객을 표적으로 산적들이 노략질을 하여 “도적고개”로도 불렀다. 당시 선정을 베풀었던 한 과천현감은 남태령에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자, 안양 귀인마을(坪村 貴仁洞)에 현리를 파견해 그곳 주막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과객을 50명씩 모아 관군을 호송해 고개를 넘게 했다하여 “쉬네미고개”라고도 불렀다 한다. 


하지만 이후 현리들이 호위해 준 대가를 요구하여 고개 넘는 돈을 마련해야 했는데 그 도적행위가 여우 짓 같다하여 “여시고개”(엽시현:葉屍峴)라고 불렸다는 야사(野史)가 남아있다.


▷ 어둠속 흰 소복의 여인을 만난 선비



조선 인조 때 호남지방에서 과거를 치루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한 선비가 과천을 지날 무렵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전에도 이곳 고개를 넘은 경험이 있는 선비는 이 고개가 높지 않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길을 재촉했다. 고개 너머 주막에서 하룻밤 묵어갈 심산이었다. 


초저녁 고갯마루에 이르자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때 어두컴컴한 길가에 주저앉은 여인네가 “선비님! 선비님! 소첩을 좀 도와주십시오.”라며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선비는 절박한 청을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보니 어둑한 밤인지라 상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흰 옷을 입고 있는 젊은 여인이었다. 


선비는 밤길 고갯마루에서 만난 여인이 당혹스러워 “밤길에 여인 홀로 어인 일입니까?” 물었다. “소첩은 아래 골짜기 마을에 살고 있는데, 과천현에 있는 친정집에 다녀오는 길에 다리를 겹질려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디 소첩을 도와주십시오.” 여인은 일어서려다가 몹시 아픈 기색을 하며 또다시 주저앉았다.    

 


선비는 난감했지만 밤길에 만난 여인을 외면할 수도 없어 여인을 부축해 조심스레 산길을 내려와 여인의 집에 당도하였다. 여인은 고맙다 인사하며 호롱불을 밝혔다. “선비님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소첩의 집에 술이 조금 있으니 몇 잔 드시고 가십시오. 부디 소첩의 성의를 뿌리치지 마시고 거두어 주십시오.” 


선비는 여인 방에 들어가는 것이 민망했지만 간청을 뿌리칠 수 없어 안방으로 들어갔다. 정갈한 방안의 호롱불 빛에 드러난 여인의 모습은 황홀하리만큼 고왔다. 여인은 절름거리며 부엌으로 나가 소반에 술과 안주를 간소하게 차려 내왔다.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술잔에 술을 따르니 선비는 저녁을 거른 탓에 따라주는 술을 연거푸 몇 잔 마셨다. 여인은 술을 따라주며 몇 년 전 남편이 이름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혼자 살고 있는 과수댁이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날이 어두운데 누추한 집이지만 하룻밤 묵어가라 하였다. 



선비는 여인이 홀로 사는 집에 외간남자가 어찌 묵어갈 수 있느냐며 사양했다. 하지만 빈속에 연거푸 마신 술기운이 오르며, 나른한 졸음이 밀려와 방안에 비스듬히 누워 깊은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잠이 든 선비는 새벽녘에 어렴풋이 잠이 깨었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옷을 벗고 향긋한 이불속에 있는데 과수댁 여인이 자신의 팔을 베개 삼아 살포시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밤 선비는 어두운 고갯길에서 만난 여인과 하룻밤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이튿날 아침햇살에 깨어난 선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젯밤 여인의 안방 이불속에 잠들었던 자신이 산골짜기 덤불속에 누워있고 자신의 옷가지와 봇짐이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당황한 선비는 평심을 되찾아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이 누워있었던 자리에 하얀 여우털이 흩어져 있었다. 지난밤 여우에게 홀린 것임을 깨달은 선비는 혼비백산하여 고갯마루로 뛰어 올랐다. 하지만 아침나절 고갯마루에는 한양을 오가는 사람들만 보일 뿐 여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 과천촌로가 지어 바친 남태령 유래     



남태령은 조선후기 정조의 하명에 의해 붙여진 이름으로 이전에는 여우고개라 불렸다. 해발 183m의 야산고개로 령(嶺)이라고 불리기에는 왠지 어색한 듯 느껴진다. 통상 령이라 함은 해발 800m이상의 고갯길을 칭하고 있는데 나지막한 남태령을 령(嶺)으로 부르는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가 불우하게 일생을 마친 것을 애달파하며 지극한 효성으로 과천을 거쳐 화성 현륭원 행차를 시행하였다. 어느 날 정조가 능행차시 고갯마루 터에서 잠시 쉬어가게 됐는데 주변을 지나는 백성들은 감히 용안을 볼 수 없으므로 엎드려 있었다.     


이 지역은 과천현에 속해있어 과천현감을 비롯한 관하 6방 비속(卑屬)들이 임금을 배알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고개를 오른 정조는 매번 행차마다 고생하던 터인지라 잠시 쉬어가며 엎드려 있던 한 촌로에게 고개이름을 물었다. 노인은 “남태령이라 하옵니다.”라며 고개이름을 지어 아뢰었다. 


본래의 고개이름을 알고 있던 과천현 이방이 “네 어찌 거짓이름을 대었느냐”며 꾸짖었다. 이에 정조가 촌로에게 거짓명칭을 말한 연유를 물었다. 노인은 이 고개가 도적고개와 여우고개로 불러지니 상감마마께서 물으심에 상스러운 이름을 감히 말씀드릴 수 없었나이다.    

  


이 고개가 한양도성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가장 큰 고개라 생각하여 남태령(南泰嶺)이라 아뢰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정조는 노인의 설명을 듣고 촌로를 가상히 여겨 주지(周知)라는 벼슬을 내렸는데 이후로 이 고개를 ‘남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남태령에는 백성들이 약 30여호 마을을 이루며 남태령을 왕래하는 과객에게 주막거리를 제공했는데 그 촌로는 마을에 살고 있던 변씨(邊氏)라고 전해오며 지금도 남태령 부근에는 변씨 일족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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