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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May 02. 2016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04)

배다리 건너 화성행차 옛길(下)


배다리 건너 화성행차 옛길(下)     

  

『원행정례』에 따르면 시흥로 노정의 길이가 도로 83리 교량 24곳이라고 밝혀놓았다. 이 길은 1794년 개설한 신작로(新作路)로 노량주교(鷺梁舟橋)를 건너 장승배기-대방동-시흥동-안양-의왕-수원에 이르는 길이다.


정조는 1795년(7차 원행) 창덕궁을 출발하여 20리를 지나 노량행궁에서 식사를 한 뒤 만안현(萬安峴:만양로고개), 장생현(長生峴:장승배기고개), 번대방평(蕃大坊坪:대방동), 문성전로(文星前路:시흥대로)를 거쳐 20리길인 시흥행궁에 도착해 하루를 묵었다. 이튿날 만안교안양행궁을 거쳐 25리를 걸어 사근참행궁에 도착한 뒤 지지대고개를 넘어 18리길인 화성행궁에 도착했다.  

   

옛사람들은 한양에서 100리 거리에 수원이 있다했는데 『원행정례』에는 83리로 기록돼 있는 것이 의아해진다. 네이버지도에서 중간 경로를 넣어가며 [창덕궁]에서 시흥로를 따라 [화성행궁]까지의 거리를 추정해보니 약 46.65km, [화성행궁]에서 화산을 거쳐 [현륭원]까지는 약14km인 것으로 측정된다. 이에 궁금증이 더해져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초기(세종 조)에는 거리를 재는데 있어 明代의 주척(周尺)을 기준으로 삼았다.


네이버 위성지도로 측정헤 본 시릉로(파랑)와 과천로(빨강) 행차길

淸代인 조선말기에 김정호가 편찬한 [大東地志 程里考]에는 “用周尺六尺一步三百六十步一里三千六百步十里”로 1보가 6척으로 기록돼 있으나, 조선초기 明代의 1척은 31.1cm이고 1보를 5척(155.5cm)으로 산정(算定) 하였다. 따라서 10리(3,600보)는 5,598m이므로 당시에 10리(里)가 5.6km이었던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이 셈법으로 보면 당시 83리는 46.48km이였고 지금의 셈법으로는 116리 이기에 옛 한양과 수원거리가 대략 100리 이었음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이와 달리 삼남로를 따라 과천을 경유해 수원에 이르는 과천로의 경우 노량주교를 건너 노량행궁(용양봉저정)까지는 시흥로와 일치하였다.


이후 길은 상도동 만안현(萬安峴:마냥고개)과 금불고개(숭실대고개)를 지나 사당리(舍堂里)와 남태령을 넘어 과천행궁을 거쳐 인덕원(仁德院)과 군보천점(軍堡川店: 안양교도소 인근)을 지나 원골주막이었던 원동점(院洞店: 의왕 성라자로마을)까지만 열거하고 이후는 이하견상(以下見上)이라 하여 그 이하는 시흥로 노정(路程) 중간지점과 맞닥뜨리는 사근참행궁을 지나 지지대고개를 넘어 지나갔음을 알 수 있다.  

  


네이버지도를 통해 측정해본 과천로 노정 길이는 약 47.27km 이었기에 당시의 기록인 도로상 85리(교량 21곳)와 거의 일치해 보인다. 따라서 과천을 경유하는 원행 길은 지금과 달리 시흥과 안양을 경유하는 시흥로보다 2리가 더 멀고 교량 수는 오히려 3개가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의 현륭원 행차를 위한 과천로 원행(園行)은 1794년 시흥로를 개설하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과천 길은 조선건국 후 한성으로 가는 중심노선이자 역대 군왕의 온양온천 길이기도 했다. 정조는 과천 길로 행차하며 1760년(영조 36) 사도세자의 온양행차를 맞이했던 백성들에게 지난날 은혜를 베풀어주며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주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는 [수원 화성]이 완공되던 1796년에 앞서 1794년 한 해 동안 새로운 시흥로를 닦도록 하고 이듬해부터는 시흥로를 따라 제7차 원행에 나서게 되었다. 1795년 2월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위해 수천 명의 일행을 동행하고 시흥로를 따라 화성행차에 나선 정조는 안양 삼막천에 이르러 임시로 만들어진 나무다리를 건너며 이곳에 석교를 놓도록 전교(傳敎)하여 만안교(萬安橋)가 세워지게 되었다 한다.

  


안양시 석수동에는 안양천으로 흘러들어가는 삼막천이 있는데 그 위를 가로지르는 돌다리는 물길이 7갈래로 갈라져 흐르도록 무지개 모양의 수문 7개를 갖춘 홍예(虹霓)양식 석교이다. 길이가 30여m, 폭이 8m로 축조되어 오가는 사람들이 부딪치지 않도록 넉넉한 규모를 갖고 있다. 당시 한양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은 과천으로 통하는 삼남로가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이 길은 좁은 다리가 많을 뿐만 아니라 남태령 고갯길이 비좁고 험하여 매번 행차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어느 날 정조는 쉬어가던 과천인근에 김상로 형제의 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심기가 불편하던 차에 수원으로 가는 다른 길을 닦도록 하였다. 따라서 한강이남 노들나루를 거쳐 만안현(만양로고개)에서 갈라지는 시흥방면과 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들어가는 새 길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안양에 이르러 왕이 행차하는 길에는 임시로 나무다리를 가설하는 일이 있었다. 가설다리는 행차 때마다 만들었다가 행사가 끝나면 철거하는 것이 상례였기에 정조는 평상시 백성들이 편히 다리를 이용할 수 있도록 경기관찰사에게 명하여 영구적인 돌다리를 놓게 하였다.



3개월에 걸쳐 다리가 완성되자 정조는 60세 회갑을 맞은 혜경궁 모친의 만수무강을 비는 의미를 담아 만안교라는 이름을 친히 내렸다. 또한 석교 남단에 거북이 등에 萬安橋를 새긴 교비를 세워놓았다. 비 뒷면에는 다리축조 시 경기도관찰사와 병마수군절도사 및 수원·개성·강화의 유수(留守)까지 동원된 대규모 공사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만안교는 당초 이곳에서 남쪽으로 200m 떨어진 만안로 입구에 있었으나 국도확장을 위해 1980년에 현재위치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한다. 지난날 목포와 신의주를 잇던 1번국도의 수원구간은 2백여 년 전 정조의 행차 길을 기본노선으로 하였다.


강폭이 좁아 한강을 건너기에 가장 용이했던 노량진 배다리를 건너 시흥로를 따라 노송지대를 지나 장안문(북문)과 팔달문(남문)으로 이어지는 도로였다. 이 길은 1906년 “신작로”라 불리는 자동차도로가 만들어지며 도로 폭이 넓혀졌다. 일제는 침략발판을 위해 1905년 노량진의 한강철교를 지나는 경부철도를 개통하고 이어 1917년 제1한강교(현 한강대교)를 준공했다.


1957년 임시 가설된 한강주교

하지만 제1한강교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국군이 후퇴할 때 폭파한 뒤 1958년 5월 복원공사를 거쳐 재 완공되었다. 1957년 서울시민들의 불편을 덜고자 미군의 지원을 받아 한강철교 옆에 육군공병대가 작은 배다리를 놓아 한강주교를 가설하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까지 주요교통수단은 철도였으며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이전까지 철도가 국토의 대동맥역할을 하였다. 정조 때 수원화성 행차 길이자 1번국도였던 시흥로는 1976년 경수산업도로로 대체되었다.


[사진출처: 사진작가/ 임성환]

[참고문헌]

✓ 과천시지(果川市誌) : http://www.gcbook.or.kr

   - 웹과천시지탐색기/ 제1권>2편/3장/4절>277면 “과천행궁과 정조 능원(陵園) 행행(行幸)”

✓ 의왕문화원 : http://www.uwcc.or.kr

   - 의왕시사> 자연과 역사> 정조의 능행차와 사근행궁> 현륭원 거둥> 과천로

✓ 한국콘텐츠진흥원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화성의궤)> 행차이야기> 둘째날> “묘시_시흥행궁출발”

✓ 동아시아사 연표 (1992 청년사 발행, 김안국) “제2부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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