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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Apr 26. 2016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03)

배다리 건너 화성행차 옛길(上)


배다리 건너 화성행차 옛길(上)


조선후기 정조는 배봉산(휘경동) 아래에 있던 사도세자 묘소를 1789년(정조13) 수원부 화산기슭 [현륭원]으로 천봉(遷奉)하고 정기적 원행을 제도화했다. 이때부터 수원부(水原府) 현륭원 행차에 수반되는 각종 절차와 행사규모 등을 상세히 규정한 원행정례(園幸定例)를 만들도록 하여 삼남로(三南路)의 과천길을 거쳐 매년 실시하던 원행을 차질 없이 치르도록 했다.


특히 1795년(정조19) 모친 혜경궁홍씨 회갑연을 위한 행차부터는 시흥길을 거치며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편찬해 후세에 전하고 있다. 『원행정례(園幸定例)』에는 돈화문에서 수원 현륭원 재실(齋室)까지 지명 및 행궁과 교량 명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밑에 2행의 소문자로 지역경계나 지역간 거리를 명기해 놓았다.


정조는 7차 현륭원 행차를 위해 1795년 윤2월 9일 묘시(卯時) 호위병 3천명을 포함한 수천 명의 행렬을 이끌고 창덕궁 돈화문을 나섰다. 이어 돈녕부(종로세무서)-파자전(把子廛: 단성사)-종루(보신각)-대광통교(大廣通橋: 청계천광통교)-소광통교(남대문로1가)-동현(銅峴: 명동)-송현((松峴: 한국은행본점)-숭례문에 이르렀다.


숭례문을 지나 도저동(桃楮洞: 동자동, 서울역주변)-청파배다리(갈월동 쌍굴다리)-율원현(栗原峴: 원효로2가)-만천주교(蔓川舟橋: 용산역부근)-노량주교(한강철교인근)를 지나 오시(午時) 초일각(初一刻: 11시30분) 쯤 노량행궁에 도착하였다.


네이버지도의 돈화문에서 경유지를 따라가 본 노량행궁 노선

정조는 천봉의식 행차를 포함해 1800년 훙서하기 전까지 13회의 화성행차를 거행하면서 행차를 위해 1790년부터 5년간에 걸쳐 한양에서 수원에 이르는 경유지에 과천, 시흥, 안산, 안양,  사근참(肆覲站), 화성 등 6개 행궁을 설치하였다.


그밖에 노량행궁은 1789년 망해정(望海亭)을 구입해 주정소(晝停所)로 사용했던 것으로 [용양봉저정기]에 기록돼 있다. 정조는 노량행궁에서 주위를 살펴보고, “북쪽의 우뚝한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마치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대고 봉이 나는 것처럼 보여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으로 이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용양봉저정에서 바라보이는 한강대교

당시 주변에는 나루터와 배다리를 관장하던 주교사(舟橋司) 관아건물이 여러 채 있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이곳의 행궁은 정문과 전각 등 두세 채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한때는 음식점으로 사용될 정도로 훼손되어 자금은 행궁모퉁이에 주춧돌 몇 개만이 옛 자취를 남기고 있다.


고종실록에는 1867년(고종4) 왕이 남한산성을 둘러보고 도성으로 돌아올 때 용양봉저정을 들려 주교를 통해 한강을 건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1930년 일본인에 의해 행궁건물 일부와 주교사가 철거되면서 부근일대는 식당과 유흥시설로 바뀌어졌다고 한다.  

    

노들나루 인근 주정소(晝停所)인 용양봉저정(노량행궁)

1986.02.11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한강변 문화재와 유적지를 발굴하기 위한 고증위원회가 구성되어 용양봉저정을 포함한 복원작업을 착수키로 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정조는 출발당일 화성도착이 어려웠기에 하룻밤 묵어갈 행궁이 필요했다.


하지만 행차를 위해 세워진 정식행궁 중 현재 남아있는 곳은 노량행궁을 제외한 과천행궁(온온사)와 안산행궁(취암지관), 화성행궁(봉수당) 3곳뿐이며, 이 행궁들은 그나마 1986년 이후 복원된 것이다. 시흥행궁(금천구 시흥5동주민센터), 안양행궁(안양역로타리 주변), 사근참행궁(의왕시 고천동주민센터)은 현재 멸실돼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시흥행궁은 1794년(정조19) 경기감사 서용보에 의해 금천현 동헌(東軒) 관아에 설치된 행궁이다. 1795년 윤 2월 15일(행차 이렛날) 오후 화성행궁을 출발한 행렬이 시흥행궁에서 하루 쉬어갔다는 [시흥환어행렬도]가 남아있다.


당시 시흥행궁에 머문 인원이 1,700여 명이었고, 그 외 식사준비에 동원된 인원을 포함하면 최소 2,000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능행길에 관여됐던 총인원은 6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시흥행궁은 114칸의 대규모로 객사와 대청이 각각 3칸, 동상방과 서상방 각 2칸, 음식을 준비하던 수라가(水喇家) 10칸, 수행원 음식을 준비하던 공궤가(拱饋家) 5칸 등이 기록에 남아있다.


옛 행궁 터에 들어선 백화점과 830년 수령 은행나무

지금 옛 시흥행궁 동헌관아 터에는 동주민센터와 대형 카멜리아 백화점이 들어서 있고 8백년 넘은 은행나무와 표지석만 외로이 남아있다. 안양행궁도 만안교를 가설하기 1년 전인 1794년에 경기감사에 의해 주필소(駐蹕所)로 건립되었는데 정조가 쉬어갔다 하여 마을이름이 주접동(住接洞)이 되었다고 전한다.


주필소란 임금이 쉬어가기 위해 마련된 건물로 왕의 숙박을 위해 만들어진 행궁과는 구별돼야 하지만 통상 행궁이라 불러지고 있다. 옛 행궁 터는 안양역 로터리 인근(안양1동 674-29)으로 추정되며 근세기 민간인소유로 전환돼 한때 여관건물이 들어섰다고 전한다.  


시흥행궁 동헌관아자리 표지석

사근참행궁은 1760년 사도세자가 온양온천 행차 때 쉬어간 곳으로 정조가 사도세자 묘를 화성으로 이장하던 1789년 점심을 들기 위해 머물던 행궁이다. 당시 정조가 행궁인근에 다다르자 백성들이 마중을 나왔는데 그 중 한 늙은 걸인(乞人)이 임금에게 구걸을 하였다 한다.


정조는 노인의 나이를 물어본 뒤 행우승지에게 명하여 몇 말의 쌀을 나눠주게 했는데 이를 계기로 사근참(肆覲站)행궁이라 불렸다 전해진다. 옛 행궁 터에는 동주민센터가 들어서 있고 정문 앞에는 옛 행궁자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시흥로를 통한 현륭원 원행(園行)이 안정되자 정조는 1797년(정조21) 8월 어가를 안산읍 동헌 객사로 바꿔 하루를 묵어갔다.


고천동주민센터 정문 앞에 있는 사근참행궁자리 표지석

안산읍성 관아에 있는 안산행궁 동헌 객사(客舍)이다. 지금은 사라진 읍성은 수암봉 능선을 이용해 평지를 감싸도록 쌓은 평산성(平山城)이었다 한다. 성곽 서쪽과 북쪽은 가파른 산세(山勢)의 자연지형을 이용하고 평지인 남쪽은 돌과 흙을 다져 성벽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1669년(현종10) 현 위치로 옮겨진 객사와 동헌 등 행정시설 및 옥사와 창고가 있었을 옛 관아는 모두 멸실돼 2010년 복원된 객사건물만 세워져있고 6백년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남아있다. 건물 옆에는 관아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수암면사무소로 사용됐던 건물터가 덩그러니 비어있다. 그밖에 안산지역을 다스렸던 5명의 송덕비가 이곳으로 이전돼 보전돼 있다.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산26-4)


안산객사(안산행궁)와 6백년 넘은 거수목

정조가 안산을 경유한 것은 한차례로 보여 지는데 이를 계기로 안산동헌이 안산행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객사(客舍)에 머물던 정조는 천하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안산이라 하며 어제시(御製詩)를 내려 군민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향촌유적 흔적을 정리해가는 동안 불과 200년 전에 세워졌던 행궁이 근세기에 사라진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된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각 행궁을 면사무소로 사용하다가 행정 불편을 구실로 행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신식(新式)건물을 올린 것이다. 옛 행궁 터에 대부분 동주민센터가 들어서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미처 깨닫지 못한 소중한 문화재들이 일제의 강탈로 멸실된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2010년 복원된 안산객사 전경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왕릉 중 의릉(경종) 터에는 지난날 중앙정보부가 세워져있었고 헌릉(태종)은 일부 능역부지가 잘려나가 안기부건물이 들어서있다. 태릉(중종계비)에는 선수촌이 들어서있어 강릉(명종)과 단절돼 있으며 삼육대학으로 인해 능역담장이 잘려있다.


서삼릉 내 효릉(인종)은 1960년대 새마을운동을 빌미로 국가가 축협에 땅을 팔아넘겨 축협소유 사유지로 남아있다. 또한 서삼릉능역과 맞닿은 곳에는 마사회소유의 경마교육장이 들어서있고 축협목초지 목장과 골프장 등이 들어서 있다. 서둘러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 훼손된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이 절실해 보인다.



[참고문헌]

✓ 과천시지(果川市誌): http://m.cha.go.kr

   - 웹과천시지탐색기/ 제1권>2편/3장/4절>277면 “과천행궁과 정조 능원(陵園) 행행(行幸)”

✓ 문화재청

   - 모바일버전> 정조의 화성행차 이야기> “8일간에 화성행차 기록”

✓ 한국콘텐츠진흥원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화성의궤)> 행차이야기> 첫째날>

     “묘시_창덕궁을 떠나다, 오시_노량행궁에서 점심, 저녁_시흥행궁 도착”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안산행궁

✓ 금천문화원장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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