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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Apr 22. 2016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02)

조선시대의  한강 나루터


조선시대의 한강 나루터


조선시대의 뱃길교통은 주요 간선도로가 통과해야하는 한강수(漢江水)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광나루(廣津), 삼밭나루(三田渡), 서빙고나루(西氷庫津), 동작나루(銅雀津), 노들나루(鷺梁津), 삼개나루(麻浦津), 서강나루(西江津), 양화나루(楊花渡) 등이 설치되었다.


특히 광나루, 삼밭나루, 동작나루, 노들나루, 양화나루는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 물품을 건네받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나룻배는 1970년대 이후 많은 다리가 개통되며 그 자취를 감추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울에서 나룻배가 마지막으로 뜬 것은 1977년 10월말이었다.


1977.10.29 경향신문 기사에 의하면 그해 11월 1일 동대문구 면목동과 전농동을 잇는 면목교가 개통되면서 나루터와 나루터사이를 오가며 삯을 받는 나룻배는 서울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한다. 물론 직업으로서의 나룻배 사공도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묻혔다. 마지막까지 이곳에서 배를 밀던 사공은 “60년대 말만해도 중랑천은 아낙들이 빨래할 정도로 물이 맑았지만 70년대 들어 썩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그 옛날 나루터는 사라졌지만 현재 가설된 한강다리 위치가 대부분 조선시대 나루가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이는 과거 남북을 연결하는 나루터인근에 시장이 발달하며 주막과 마을이 형성돼 교통량이 많은 곳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77.10.29  경향신문

자료에 의하면 광나루/천호대교, 삼밭나루/잠실대교, 뚝섬나루/영동대교, 입석포/성수대교, 두모포/동호대교, 한강나루/한남대교, 서빙고나루/반포대교, 동작나루/동작대교, 흑석나루/한강대교, 노들나루/한강철교, 용산나루/원효대교, 마포나루/마포대교, 서강나루/서강대교, 양화나루/양화대교, 공암나루/행주대교가 가설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광나루는 중랑천을 건너 광진(廣津)에서 한강을 건너 광주를 거쳐 강원도와 남쪽지방으로 가는 경우 이용하던 곳이다. 삼밭나루(三田渡)는 한양과 광주의 남한산성을 이어주는 나루로써 뚝섬한강공원에서 송파구 삼전동에 이르는 나루길 이었다. 이 나루는 여주에 있는 세종의 영릉을 참배하러 가는 뱃길이었을 뿐만 아니라, 강남소재 선릉을 참배하기 위해 중종 31년(1536) 배다리(舟橋)를 가설했던 나루였다.


또한 한수이남 광주부(廣州府)로 가는 가장 빠른 길목이었으며 이천을 거쳐 충주 또는 여주, 원주, 강릉 등지로 나갈 경우에도 이용하였다. 마포나루는 여의도 백사장을 통해 샛강을 지나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가기위해 이용되던 곳으로 사선(私船)이 중심이었다.


옛 부터 마포나루에는 새우젓을 파는 사람들이 많아 '마포새우젓장사'라는 애칭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노들나루는 정조의 현륭원 참배를 위한 행차에 이용됐던 나루였다. 옛날에는 노량진(鷺梁津)에 백로(白鷺)들이 많이 날아와 “노들”이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이곳에 1900년 한강철교가 가설되며 수원과 전국을 잇는 교통망이 연결되었다.

 


한강나루는 제1의 도선장(渡船場)으로 한강도(漢江渡)라고 불렸으며 용산 또는 장춘단 길을 따라 충주와 천안으로 통하는 큰 길의 요충지였다. 한강진에서 한강수를 건너 사평리(沙坪里:신사동)를 따라 양재(良才)와 신원(新院:청계산입구)길을 거쳐 대모산(大母山)기슭에 헌릉으로 참배를 가기위한 길이기도 했다.


또한 도성에서 일반인들이 영남과 삼남지방을 갈 때는 동작진과 서빙고진을 이용하거나 광희문을 지나 장충단(奬忠壇)을 거쳐 한강진으로 가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왕의 능행길은 초기에는 삼밭나루와 한강나루가 중시됐으나 후기에는 송파나루와 노들나루가 중시되었다.


그 이유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인조 17년 세워진 삼전도비가 삼밭나루(三田渡)를 지나 광주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왕실은 삼밭나루 대신 송파나루를 이용하였고, 노들나루(노량진)에 배다리를 가설함으로써 한강나루를 대신해 주교(舟橋)가 설치된 노들나루를 이용하게 되었다. 한강나루를 건너 남쪽지방으로 가는 길목에는 [양재역 사거리] 일대에 말죽거리가 있었다.


양재역주변 말죽거리 마을은 한양도성에서 영남과 삼남(충청, 전라, 경상)으로 나가는 첫 번째 역이었고 영남과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관리들의 마지막 주막이었었기에 도성안팎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교통요충지였다. 한양도성 이남으로 양재역(약13.2km)을 시발점으로 30리마다 역(驛)이 있었고 역을 관찰하는 찰방(察訪)이 있었다.      


벼슬아치나 암행어사는 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말을 징발할 수 있었고 30리마다 설치된 역에서 말을 바꾸어 탈 수 있었다. 역에는 관원뿐만 아니라 일반백성들도 먼 길 가는 나그네의 경우에는 역 부근 주막집에서 식사를 하고 잠도 잘 수 있었기에 역 주변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드는 곳이었다.


1547년(명종 2)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의 수렴청정을 비판했던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보면 당시 양재역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곳 마을지명 유래가 몇 가지 있는데, 제주도에서 올려 보낸 말을 한양으로 보내기 전 이곳에서 최종으로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먹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한양과 아래지방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자신도 이곳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초기부터 말죽거리에는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는 양재역(良才驛)이 있었고 근처에는 주막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는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 파천(播遷)길에 오른 인조가 양재역에 이르러 갑자기 기갈이 심했는데 유생 김이(金怡) 등이 급히 팥죽을 쑤어 바치니 인조는 말 위에서 죽을 들고 과천을 거쳐 공주로 갔다한다. 그 이후로 임금님이 말 위에서 죽을 마셨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반차도(班次圖)

그밖에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자 용골대가 지휘하는 청 기마병들이 산성을 공격한 후 교대로 이곳에 와서 말죽을 먹였다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노들나루를 건너 노량진 남단초입 언덕에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작은 행궁 하나가 한강을 내려 보고 있다.


정조는 현륭원 참배 길에 배를 타고 노들강을 건너야 했는데 이때 400여 척의 배가 동원되어야 했다. 따라서 정조는 생업에 종사하는 선상(船商)들이 동원되는 번거로움을 최소화하고 안전하게 강을 건너기 위해 효율적인 주교를 설치토록 하였다. 1793년 정해진 [주교사절목]에는 교배선(橋排船) 38척, 좌우위호선 12척, 난간선 240척, 홍전문(紅箭門) 3개를 설치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주교의 운영관리는 주교사(舟橋司)가 맡았는데, 임금의 영접뿐만 아니라 수행원들의 간단한 식사도 제공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당시 1,779명 인원과 779필 말 등 4Km에 달하는 대규모 행렬이 배다리를 건너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돼 정조는 어가에 머물며 쉴 수 있도록 노들나루 인근에 주정소(晝停所)를 설치하고 노량행궁이라 불렀다.


용양봉저정”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마루와 온돌방을 갖추고 과천행궁으로 향하기 전 점심을 들며 잠시 휴식을 취했던 곳이다. [조선왕조 의궤] 중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김홍도가 중심이 돼 제작했던 “반차도(班次圖)”에 화성으로 행차하는 정조와 관원들의 배치상황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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