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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Apr 20. 2016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01)

창덕궁에서  이어지는  옛길


창덕궁에서 이어지는 옛길

     

경기도 과천은 1986년 내가 보금자리를 마련한 이후 40여년을 머물고 있는 제2고향이라 할 수 있다. 1968년 중학진학으로 서울에 올라오기 전까지 나는 수원에서 태어나 자랐다. 나의 어린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와 집주변은 온통 허물어져 볼꼴사나운 화성(華城)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에 파괴됐던 화성과 주변성곽은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복원되면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적명소가 되어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과천도 고향인 수원 화성과 함께 정조 임금의 사연이 전해지는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금차 국문학 교수인 지인의 제안으로 내가 살고 있는 과천의 향촌유적에 대한 옛 흔적을 찾아 기술해보기로 했다. 각종 관련 자료를 수집해 주변지역에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향촌유적지에 얽힌 사연들과 설화 등을 찾아내 독자의 흥미를 더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지역문화재의 옛 사연들을 뒤적이며 정리해 가다보니 역사문화의 큰 줄기를 옛사람들이 오가던 길(路)로부터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예로부터 길은 인간의 원초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삶의 시발(始發)이자 삶의 종착(終着)과도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1951.01) 중 포탄에 허물어진 수원 장안문(북문)

조선시대의 주요교통망은 창덕궁(경복궁) 및 종묘와 사직단 그리고 사대문과 사소문을 두고 사방(四方) 가로세로로 연결돼 있었다. 도성안의 도리(道里) 기준점은 궐문인 창덕궁 돈화문으로 하였고 각 지방과의 도리 기준점은 사대문(四大門)인 숭례문흥인지문, 돈의문, 숙정문의 성문을 기준점으로 삼았다.


또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도성을 축조할 당시 도성 사대문 사이에 사소문(四小門)에 해당하는 동남향 광희문(光熙門), 동북향 혜화문(惠化門), 서북향 창의문(彰義門), 서남향에는 소의문(昭義門)을 세워 작은 통행로를 연결하였다.


한양에 경복궁을 건설하며 정도전은 유교의 오륜(五倫)인 인의예지신(仁義禮)을 본 따 사대문의 명칭을 정하며, 동 향방 흥인지문(興之門), 서향 돈의문(敦門), 남향 숭례문(崇門), 북향 숙정문(肅靖門)으로 정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당초 북향문은 소지문(炤門)으로 추천됐으나 한성 북향이 음기(陰氣)를 품고 있어 그 기를 꺾고자 "알" 지(智)를 대신해 "꾀할", “편안할” 정()을 넣어 숙정문으로 정했다 한다.


이후 조선말 고종은 종각의 칭호를 보신각(普閣)으로 고쳐 오륜을 완성함으로써 당시 기울어져가는 조선의 부흥을 꾀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광화문 옛거리 전경

조선시대 도로는 6개 주도로(主道路)와 4개 종도로(從道路)를 포함해 10개의 간선도로(幹線道路)로 분류하고 있다. 조선후기 1861년(철종 12)에 완성된 대동여지도의 10대 간선도로를 살펴보면 한양에서 북쪽으로 2개 주도로(의주로, 경흥로), 남쪽으로 2개 주도로(영남로, 삼남로)와 4개 종도로(통영로, 봉화로, 경상우로, 수영로), 동쪽으로 1개(평해로), 서쪽으로 1개(강화로) 주도로가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간선도로는 행정구역상 현재 시(市)에 비견되는 목(牧) 이상의 큰 고을을 중심으로 대⋅중⋅소 도로로 이어져 있었다. 의주로(使行路)는 한양-파주-개성-평양-정주를 거쳐 국경 의주에 이르는 길로 옛 부터 중국사절들의 숙식과 연향(宴享)을 담당했기 때문에 한양에서 의주까지는 관사가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의주로는 10대 간선도로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교통로였다. 경흥로(關北路)는 한양-양주-회양-원산-영흥-회령-함흥을 거쳐 국경 두만강 하구 서수라(西水羅)에 이르는 길이다. 경흥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풍경을 한숨 속에 바라보며 거쳐 갔던 함흥차사 사연이 깃든 길이였으며 조선의 6개 주도로 중 2번째 큰 대로였다.

조선의 6개 주도로(主道路)

영남로 한양-한강(삼밭나루)-성남-용인-이천-충주-문경-상주-대구-밀양-동래-부산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와 해양을 연결하던 길이었고 한양을 지나는 주요 간선도로였다. 조선시대에는 일본을 왕래하는 조선통신사 경로였으며 왜사(倭使)의 입경 시 낙동강과 한강 내륙수로와 연결되었던 도로였다.


임진년에는 부산포에 상륙한 수십만의 왜군이 이 길을 따라 진공해 왔었다. 하지만 일제치하에 경부철도와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이 길의 역사적의미가 사라지고 말았다. 종도로(從道路)인 통영로 영남로에서 갈라지는 길로 한양에서 상주까지는 영남로와 같고, 상주-성주-창녕-함안-진주-고성을 지나 통영에 이르는 길이다.


봉화로 역시 한양에서 영남로의 충주를 지나 안동과 봉화에 이르는 길로 봉화 동북쪽 태백산에 사고(史庫)가 두어짐에 따라 내왕하기 위한 도로였다. 삼남로는 한양-한강(노들나루)-과천-수원-천안-공주-익산-전주-정읍-나주-해남을 거쳐 수로로 제주에 이르는 길로 충청, 전라, 경상도를 연결하는 길이었기에 삼남로라고 불렸다. 경상우로는 경상도로 가는 3길 중 오른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한양에서 익산까지는 삼남로와 같고, 익산-남원-함양-진주를 거쳐 통영에 이르는 길이다. 수영로(水營路)는 삼남로의 공주를 지나 충청수영(충남 보령 오천)에 이른다. 평해로(關東路)는 한양-양평-원주-대관령-강릉을 거쳐 평해(울진)에 이르는 길이고 강화로 한양-양화도(楊花渡)-김포에서 강화에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조선의 주요 간선도로는 조선후기로 가면서 점차 도로건설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당시 기술이 없었다기보다는 외적(外敵)의 침략 시 침략 길을 주지 않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지만 역사기록을 보면 그럴듯한 통로가 조선의 도로망이었다.


하지만 도로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자연 유실되는 것이기에 조선후기 대부분 길들은 상당히 축소되었고, 서넛 사람이 나란히 다니기도 힘든 지경이 되어있었다. 조선의 도로 폭은 넓은 곳이 10m, 좁은 곳이 3m 정도였는데, 조선말에 조선을 방문했던 선교사들에 기록에 의하면 “한성의 길들은 좁은 골목길 투성이 인데 대부분 어깨를 비비면서 겨우 걸어가게 되어 있다.


또한 조선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도로 사정인데, 모든 길들은 대단히 좁고 구불구불하며 더럽다. 대부분 길들은 전답사이로 나 있고, 예외적인 곳은 험준한 산길이었다. 한마디로 조선의 도로는 대부분 논두렁길 이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19세기말까지도 도로는 사람과 우마차의 길이었으며 그 길은 자연과 더불어 형성된 길이었다. 대부분 수레와 가마가 지나갈 수 있었으나, 문경의 관갑천(串岬遷) 잔도, 삼랑진의 작천(鵲遷) 잔도, 물금의 황산(黃山) 잔도와 같은 벼랑길은 디딤판을 밟고 가까스로 지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조선의 길은 거칠고 열악하기는 했지만 30리마다 일식(一息) 또는 참(站)의 거리에 역(驛)을 두어 지친 과객이 장국밥 한 그릇을 들며 쉬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경상도 사람들은 영남로를 이용해 과거 길에 올랐고 호남 사람들은 삼남로를 통해 과거를 치르기 위해 올라왔다.


하지만 [삼남로]는 정도전정약용 등 정적(政敵)에 의해 유배됐던 수많은 관리가 귀양살이 가던 길이기도 했다. 또한 전라좌도에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내달렸던 길이요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선조의 애환이 깃들여있는 옛길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백성들도 함께 걸었던 삶에 시발이자 종착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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