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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03. 2015

조선왕릉 탐방

(11) 화성 융건릉  Storytelling


고향인 경기도 수원, 원천동지점에서 은행생활을 마감했지만 정조와 사도세자에 얽힌 주변 화성 유적지를 들러 볼 기회조차 만들지 못하고 퇴직 후 능역과 봉분잔디가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늦가을이 되서야 비로소 융건릉 탐방 길에 올랐습니다. 융릉은 사도세자인 추존왕 장조(莊祖) 헌경왕후 능이고, 건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 능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입장을 기다려 융건릉을 들어선 일본인 방문객

 영조로 인해 27세 단명했던 사도세자의 슬픈 사연과 독살설이 끊이지 않는 정조의 안타까운 사연들에 분위기를 사진에 가득히 담고자 임성환 동기와 이른 아침 출발했습니다. 능 관리소의 개방시간이 9시인데 이른 도착으로 입장을 기다리는 일본관광객이 제법 됩니다. 첫 방문객 으로 들어서는 쌀쌀한 능역에는 가을안개가 자욱한데, 사진작가의 말대로 안개에 덮인 능역 숲길과 왕릉풍경이 가히 환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참도 주변 길이 넓게 조영된 조선후기 양식을 보여주는 건릉

먼저 정조가 잠들어 있는 건릉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정조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대왕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요. 이후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걷게 돼 임금의 이른 죽음에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정조는 아비의 묘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며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재위기간 중 한양서 수원까지의 경유지에 많은 행궁을 설치했었죠.  

   

그 중 화성행궁이 가장 대표적인 행궁으로 남아있으며, 사도세자 능 천장이후에 11년 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할 정도로 정조는 효자였습니다. 48세 승하한 정조는 당초 부친능인 융릉의 동쪽언덕에 안장했는데, 순조 조에 정조비가 승하하여 정조 능 부근에 안장하하자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주장으로 건릉을 서쪽인 현 위치로 천장했습니다. 가을안개속의 건릉은 계몽군주였던 정조의 혼령을 마주하기에 적격인 듯합니다.


늦가을 안개와 황금색이 어우러져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건릉

발길을 돌려 비운의 세자인 장조 융릉으로 향해 봅니다. 정조는 즉위 즉시 장헌이란 시호를 올리고 현륭원을 융릉으로 추봉했습니다. 융건릉은 모두 합장릉이며, 융릉에는 병풍석이 설치돼있으나 건릉에는 병풍석이 없네요. 영조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졌던 세자는 원래 동대문 밖 양주군 중량포 배봉산 기슭(휘경동)에 안장됐습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애도하는 뜻에서 思悼 라고 했지요.

       

사도세자는 어려서 총명하고 다방면에 뛰어난 왕세자의 면모를 갖췄다지요. 하지만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노론 및 영조계비 정순왕후 모함 등으로 영조와 세자 간에 갈등이 시작되며 폐서인이 됐고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숨졌지요. 대부분 왕릉은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홍살문우측에 원형연못 곤신지가 있는데 이는 모두 풍수논리에 의해 조영된 것이라 합니다.


융릉인근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원형연못인 坤申池

융릉에서 1.5km쯤 떨어진 곳에는 왕릉의 원찰인 용주사가 있는데 이곳은 초등학교시절 늘 소풍코스로 정해져있던 곳입니다. 한 많은 사도세자를 애달파했던 정조가 그 아비와 나란히 묻혀있는 융건릉(隆健陵)에는 이승서 못 다한 그들의 아쉬움을 남아있는 듯 짙은 안개가 배어있었습니다. 9월부터 서둘러 시작했던 조선왕릉 탐방은 11월 초순 융건릉을 끝으로 무사히 회를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  사진작가  임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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