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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May 06. 2016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06)

정조일화가 깃든 과천유적(上)


과천행궁 온온사

온온사는 조선조 과천현의 관아에 딸린 객사(客舍)이다. 조선 초기 이곳에 과천현 관아가 자리했으며 이후 1649년(인조 27) 객사가 축조돼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면서 1980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놓은 곳으로 고을수령이 초하루와 보름날에 전패를 향해 배례를 올렸던 곳이다. 


또한 왕명을 받든 관리가 공무를 수행하며 숙소로 사용했던 곳으로 고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위치하였다. 1699년(숙종 25)에 간행된 [과천현 신수읍지]에 따르면 과천현감이었던 여인홍이 재직(1649~1651년) 중 동헌(東軒)을 창건한 것으로 돼있다. 각 고을 현의 동헌은 지방관리 현감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곳이지만 외지의 관리들이 숙소로 이용했던 곳이기에 객사라고도 칭한다.

 

당초 과천관아의 동헌객사를 온온사로 칭하게 된 것은 정조 연간(年間)이었다. 1789년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의 원묘인 양주소재 영우원(永祐園)을 수원 화성으로 천봉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한 뒤 이후로 12회 능행차를 시행하였다.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길 58 (관문동 107-5)

1790년(정조 14) 참배를 위한 능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정조는 과천객사에 머물며 “주위경관이 아름답고 쉬어가기 편안하다”하여 객사 서헌에 온온사(穩穩舍)라는 사호(舍號)를 내리고 동헌은 옛 과천의 별호인 부림헌(富林軒)이라는 편액을 친히 써서 하사했다고 전해오는데 온온사에는 현재 정조친필인 [穩穩舍] 현판만 남아있다. 


온온사는 앞면에 툇마루를 두르고 중앙에 제례를 올리는 정청(政廳)이 있으며 좌우에는 공무를 수행하는 동헌과 숙소로 사용하는 서헌이 구분되어 있다. 고을중심에 위치했을 객사 온온사의 원래자리에는 중앙동사무소가 들어서 있었는데, 2012년 신축 건물로 이전하면서 구 건물은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 “건강가정지원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온온사는 1986년 12월 중앙동사무소 뒤 터인 지금에 자리로 옮겨져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객사를 둘러보면서 건강가정지원센터에 위치해 있던 온온사가 불과 몇 십 미터 뒤로 옮겨져 복원된 사연이 궁금해졌다. 각종자료를 종합해보니 1895년(고종 32) 행정개편으로 과천현이 경기도 과천군으로 조정되며 객사는 군청사로 사용되었고 1914년 시흥군 과천면으로 개편되면서 면사무소로 사용돼왔다.



이후 일제강점기였던 1932년 일본식 건물로 면사무소를 신축하며 온온사를 헐어 객사원형이 일부 훼손되었다. 이때 객사일부는 온온사 현판과 함께 부속 건물로 남겨둔 채 1986년 과천시 승격과 함께 중앙동 동사무소로 사용돼오다가 그해 12월 객사를 해체해 동사무소 건물뒤편에다 온온사를 복원한 것이다.     


객사는 정청에 전패를 모셔 지방관이 국왕의 충성을 다짐하던 곳이었기에 고을수령이 집무를 수행하는 동헌보다 격이 높아 관아시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이러한 객사는 조선말까지 그 기능이 유지됐으나 일제에 강점되면서 궐패봉안이 중지되고 관아기능도 중지되었다. 


객사의 정청은 맞배지붕으로 좌우 익사(翼舍)보다 한 단 높게 조성되었으며 좌우 익사는 팔작지붕으로 그 아래 온돌과 마루를 놓았다. 하지만 객사를 복원할 때  옛 온온사 건축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전남 승주군 낙안객사를 본떠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 중앙에 맞배지붕을 얹어놓은 형태로 복원했다 한다.

     


건물은 정면9칸 중 정청(政廳) 3칸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동헌과 서헌 각각 3칸을 연결해 세웠으며 본채는 좌우건물보다 약간 높게 짓고 지붕도 가운데를 양쪽보다 약간 높게 올려 전형적인 객사건물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온온사를 상세히 들여다보면 총 아홉 칸 건물의 세 칸은 원기둥이고 좌우측의 세 칸은 사각기둥을 이루고 있다. 


안내판 설명을 확인해보니 조선시대 원기둥을 세울 수 있는 곳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국왕의 의지가 담긴 장소에만 원기둥을 세울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관천현의 관아와 객사는 임금의 능행(陵行)과 온행(溫行) 및 사냥행 등을 수행하는 행궁의 기능을 동시에 행하였기에 다른 지역의 객사보다 그 규모가 컸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과천행궁 관련기록으로는 ⌜온궁사실(溫宮事實)⌟(1796년경 편찬)과 ⌜원행정례⌟가 있는데, 사도세자 온양행궁과 정조 화성능행 때 과천관아의 객사가 행궁으로 이용됐던 기록이 있다. 온온사가 있는 지역일대는 과천관아지(果川官衙址)라 하여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당시의 석축이 남아있다.


옛 과천관아는 과천행궁인 온온사 아래 지금의 과천초등학교가 위치한 곳에 있었고 1912년 4월 1일 과천공립보통학교가 설치돼 관아건물을 사용하다가 이후 2층 교사(校舍)가 신축되었다고 한다. 


역대 과천현감 비석군과   600년 된 은행나무

온온사 입구에는 옛 과천관아의 중심지이었음을 확인해주는 600년 된 은행나무(높이 25m, 둘레 6.5m)가 서있고, 그 거대한 노거수목 옆에는 15기의 역대 현감 선정비(歷代縣監碑石群)가 모여져 있다. 


이 비석군은 시흥군 과천면 관문리 홍천말 249-5번지 도로변(현 시민회관 앞 근처)에 있던 것을 신도시개발 도로정비 때 과천초등학교 옆으로 이전했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졌다. 비석군은 1782년(정조 6)에 건립된 현감 정동준 비를 비롯해 1928년 구장(區長)을 지낸 변성환 비석에 이르기까지 15명의 조선시대 비석이 보존돼 있다.  

    


이곳의 비석명칭은 다양한데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8기, 선정비(善政碑) 3기, 거사비(去思碑) 2기, 인정비(仁政碑), 자선비(慈善碑) 각 1기가 있다. 거사비는 고을수령이 떠난 뒤에 그 선정을 추모해 백성들이 세웠던 비를 말한다. 


비석군 중에는 인조14년 과천현감을 역임한 김념조의 애민인정비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과천현에 부임했던 현감들의 공적비는 건립연대에 따른 비석 변화상을 알 수 있어 시대에 따른 비석형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대부분 비석은 장방형 비좌(碑座)에 비신(碑身)을 갖춘 전형적인 조선조 양식을 보이고 있다.


▷ 역대 과천현감 비석군


[사진출처] 사진작가/ 임성환     

[참고문헌]

✓ 과천문화원 (www.gccc.or.kr)> 문화재> 지정문화재

✓ 과천시지> 문화유산> 지정문화제 현황> 유형문화재

✓ 디지털인천남구문화대전> 경기 읍지

✓ Wikipedia> 온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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