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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May 10. 2016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07)

정조일화가 깃든 과천유적(中)


과천현감과 선정비 

   

과천현 현감으로 부임해 선정을 베푼 현감들을 기리기 위해 백성이 세운 공덕비 중에는 병자호란 때 관악산 토굴에서 은거하며 청군과 싸운 김염조(金念祖)의 인정비가 있고, 민비 친부인 민치록(閔致祿)이 현감에 부임해 베풀었던 거사비 그리고 담장 옆에 홀로 남겨진 변성환(邊星煥)의 자선비가 눈길을 끈다. 


변성환은 1928년 일제강점기에 구장(區長)을 지내며 일제의 수탈로 굶주렸던 면민(面民)들에게 수시로 자선을 베풀었다는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풍산김씨 오미동 문중에서 보관해오던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에는 과천창의도(果川倡義圖)가 담겨져 있는데 이 서화첩은 2000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었다고 한다. 


과천현감 김염조는 병자호란 때 격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과천을 수호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과천창의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12월 16일 김염조가 관악산에서 청군사와 대처하며 과천현 일대를 수호하고 있는 의병활동 광경이 담겨있다. 화첩상단에는 현황(峴拡)이라 표시돼있어 관악산으로 보이는 고갯마루에서 북을 친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과천현은 광활한 영역을 이루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관아현감에 대한 많은 일화가 남아있다. 옛말에 알량한 지방관리가 거드름을 피울 때 빈정대는 말로 “감사는 평양감사요, 현감은 과천현감이다.“ 또는 “한양 무섭다고 과천서부터 긴다.”라는 말이 있다. 



그 유래는 옛날 과천현감 중에 일부 탐관오리가 있어 이곳 읍내를 거쳐 가는 과객들에게 산적들이 들끓던 남태령을 무사히 넘을 수 있도록 보호해준다며 금품을 받아내는 자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을 반드시 거쳐 가야하는 과객들에게는 못된 현감이 피하고 싶은 존재였을 것이다.     


한양인심이 야박해 한양이 무섭다했는지는 모를 일 이지만, 당시 노량진까지 관장하며 거드름을 피우던 과천현감도 때로는 강제통행세를 받을 구실이 애매모호 했던지 담뱃대를 물고 관아 앞을 지나가거나 말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 과객들을 붙잡아 동헌까지 끌고 와 겁을 주며 돈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에 질세라 아전들까지도 거들어 가죽신을 신은 것까지 트집을 잡아 문세를 물렸다고 하니 못된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인해 한양의 관문인 과천관아에서 적지 않은 과객들이 재물을 털린 뒤 한양가기가 무섭다고 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1794년(정조 18) 어사 이조원(李肇源)의 [서계(書啓)]에는 “과천현감 김이유(金履裕)는 청렴하게 업무를 집행하려 노력하였지만 아랫사람들을 분발토록 하는 부분에서는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성심으로 안정된 정치를 이루려했지만 질병으로 업무수행에 방해를 받았고 향리들에게 환곡수납을 맡겨 간악한 부정이 있었습니다. 이전되어 온 쌀을 창고에 보관할 때 아전과 향임들이 몰래 한 석에 9냥 9전의 높은 값에 돈으로 바꿨는데 이를 적발해 바로잡지 못했습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과천현 사방경계(四方境界) 지명

중종 조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과천현 건치연혁 항목에는 "본래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인데 신라 경덕왕 때 율진군(栗津郡), 고려 초기 과주(果州), 조선 태종 13년(1413)에 과천현(果川縣)으로 고쳤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과천은 주변지역과 합해지기도 하여 고려 현종 9년에는 광주(廣州)에 속했고, 조선의 태종 14년과 세조 2년에는 금천(衿川)과 합해져 금과(衿果)라 불리기도 했으나 이후 1914년까지는 독자적인 군현(郡縣)을 유지하였다. 조선시대 과천현은 지금의 과천시일대와 안양시, 군포시, 의왕시 대부분과 서울시 동작구서초구 등을 관할하였다. 


1861년(철종12) 만들어진 “대동여지전도”에는 과천현영역이 점선으로 뚜렷이 그려져 있는데 동쪽은 우면산에서 청계산일대, 남쪽은 안양과 군포를 포함한 지역, 북쪽은 노량진과 동작동을 포함한 한강이남 넓은 지역으로 표시돼있다. 1895년(고종32)에는 지방관제개정에 의해 과천군이 7개 면(面)으로 나눠져 있었다.


조선후기 과천군은 ①군내면(郡內面): 과천시일대 ②동면(東面): 서초구일대(서초동~양재동), 과천 주암동 ③남면(南面): 군포시일대 ④상서면(上西面): 안양시 동안구 ⑤하서면(下西面): 안양시 만안구 ⑥상북면(上北面): 동작구 동작동, 사당동, 서초구 방배동, 반포동, 잠원동 ⑦하북면(下北面): 동작구 상도동. 노량진동, 흑석동, 본동으로 매우 광활한 영역을 이뤘다.



하지만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과천군은 시흥군에 편입되면서 [시흥군 과천면]으로 축소되었다. 조선시대의 지방수령 중 과천현감은 한양이 가깝고, 삼남로를 오가는 고관들과의 접촉이 많다보니 부당한 세금징수로 재물을 모아 뇌물을 상납해 조정의 좋은 자리로 영전하려던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통상 벼슬아치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 갈 때 자신의 생전에 공덕을 후세사람들이 보게끔 비석(碑石)으로 남겼는데, 특히 조선후기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벼슬을 사고파는 일이 있다 보니 현감에 오르면 호가호위(狐假虎威)를 일삼다 떠날 때는 송덕비를 새울 것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돈을 거두는 관리를 가리켜 “현감이면 다 과천현감이냐?”라는 말도 전해지고 있는데, 조선말 갖은 수탈로 치부했던 과천현감에 관한 ‘과천현감 송덕비’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악명 높던 과천현감이 영전해 한양으로 떠나게 되자 아전들에게 송덕비를 세워달라고 했다 한다. 


고을을 떠나는 날, 현감은 송덕비 제막을 위해 비석 앞으로 다가가 큰절을 하고 비석을 감싸고 있던 보자기를 걷어 내렸다. 하지만 비면에 “금일송차도(今日送此盜: 오늘 이 도둑을 보내노라)”라고 적혀있었다. 


악덕관리 공덕비를 철거하는 백성들

탐욕스러웠던 현감은 호탕하게 한번 웃고는 이방에게 필묵을 가져오라 하여 비문 곁에 적기를 “명일래타도 차도래부진(明日來他盜 此盜來不盡: 내일이면 또 다른 도둑이 오리니, 이 도둑들은 끊임없이 올지니)”라고 써놓고 태연히 길을 떠났다 한다. 


후일 길 가던 나그네가 비문에 재기록하기를 “거세개위도(擧世皆爲盜: 세상모두가 도둑인 걸 어이하리)”라고 써놓고 떠나갔다 한다. 이렇듯 조선시대 세워진 공덕비 중 거사비(去思碑)와 인정비(仁政碑)는 진정 백성들이 선정을 추모해 세웠던 비였음이 확인되지만,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인 경우에는 선정비로 분류하기에 그 진정성이 애매모호해 보인다. 


한양의 중요한 남쪽 관문역할을 했던 과천은 삼남(三南) 사람들이 상경하거나 귀경할 때 거쳐 가는 중요한 길목이자 사통팔달 화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러한 과천현에서는 관아가 세워져있던 官門里(현 관문동)가 마을의 중심이었다. 현재 관문동 옆 지역도 동헌인 부림헌(富林軒)에서 유래되어 부림동(8, 9단지)으로 불리고 있다.      


과천관아의 다양한 사연들을 품고 있는 온온사는 언덕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강가정지원센터 건물에 가려있어 안으로 올라가 보기 전에는 과천시민들 조차도 알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역사적의미가 있는 곳이라면 관심을 기울여 후세에 물려주는 것이 현 세대들의 의무일 것이다. 과천시는 일제잔재가 남긴 흉물스런 건물이 온온사 앞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재인식하여 불원간 건강가정지원센터 건물을 헐어버리고 과천관아의 옛 형태를 복원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네이버지식백과> 세전서화첩> “과천창의도(果川倡義圖)” 

✓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 www.aks.ac.kr)> 문화원형백과> 암행어사>

   “1794년(정조 18년) 경기도 진위 용인 과천 어사 이조원 서계”  

✓ 한양이야기 (가람기획, 이경재) 220페이지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과천시

✓ 고지도를 통해 본 경기지명 연구> 과천

✓ 과천시(https: www. gccity.go.kr)>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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