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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May 12. 2016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08)

정조일화가 깃든 과천유적(下)


가자우물

     

가자(加資)우물은 과천종합청사를 지나 인덕원 방면으로 주공12단지 아파트를 지나면서 갈현삼거리의 우측(찬우물 버스정류장) 지근거리에 있다. 현재 우물과 주변이 화강암으로 정비되었으며 우물 받침대에는 약 10㎝ 가량의 맑은 물이 고여있다. 


이 우물 옆에는 찬우물이라고 불리는 우물지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가자우물은 남태령과 마찬가지로 정조의 능행과 관련된 야사가 전해오고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원인 수원 현륭원에 능행(陵幸)할 때마다 과천을 통과했는데, 어느 날 이곳에 이르자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7-2번지 (찬우물로 24-10)

이때 한 신하가 근처 찬우물의 우물을 떠다 바치니 이 물을 마시고 물맛이 유난히 좋다 하여, 이때부터 이 우물에 벼슬을 주어 “당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가자당상(加資堂上) 벼슬을 제수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가자당상”이란 정3품 이상의 품계로 왕이 직접 관리하는 곳을 의미하며 이런 연유로 이 우물을 가자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우물은 또한 한여름에도 시원하다하여 찬우물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원래는 암반의 틈새에서 솟아나 많은 샘물로 이루어져 우물로 솟아나는 약수로도 유명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수량이 줄어들었으며 과천시에서 향토유적으로 지정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인근의 지하수를 유입해 복원 정비하였다.




김약로 묘

조선후기 문신인 김약로(金若魯)는 본관이 청풍으로 1727년(영조 3)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숙종실록』 보충의 잘못을 논하다가 잠시 유배당하기도 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영조 25년에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숙종 조에 대제학을 지낸 김유의 장남이자 영조 35년 영의정을 지낸 김상로(金尙魯)의 친형이다. 


그의 사촌형인 김재로(金在魯) 역시 영조 16년 영의정에 오른 인물로 이들 형제는 당대에 삼정승을 배출한 대단히 출세한 일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김약로의 묘는 과천시 갈현동 갈산농원 내에 있다. 갈현 삼거리 우측에 가자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에서 북쪽으로 소로(小路)를 따라 마을위로 들어가면 갈산농원이 나타난다. 


묘역은 근자(近者)에 새롭게 정비된 듯 보이는데 곡장이 둘러져 있다. 봉분은 원형 봉토분으로 병풍석을 둘렀다. 묘를 중심으로 앞쪽에 혼유석(석상)이 놓여있고 그 앞으로 장명등이 있다. 묘 앞 좌우에는 망주석과 석양이 각 1쌍 배치돼 있으며 문인석이 1쌍이 나란히 마주보고 있어, 묘의 규모만 작을 뿐이지 왕릉이 무색해 보일만큼에 격식을 갖추고 있다.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 19-1

묘 우측의 비석 전면에는 “조선의정부좌의정 증시충정만휴약로묘(朝鮮議政府左議政 贈諡忠正晩休金公若魯墓)”라고 적혀있고 건립연대가 乙亥十月(1755년)로 되어있다. 망주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고 문인석은 대략 160㎝ 키에 금관조복을 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표현이 사실적이면서 신체의 비례가 뛰어나 보인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김상로의 묘는 과천에서 안양을 넘는 고개 아래 찬우물 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정조는 당초 사도세자 묘가 있는 수원화산 행차를 위한 능행길을 나설 때 과천을 경유하는 삼남로를 거쳐 행차하였다. 총13회 행차 중 초기 능행노정은 노들나루를 건너 남태령 고개를 넘어 과천을 경유하는 길이었고 7차 능행부터는 노들나루에서 시흥과 안양을 지나가는 시흥길 이었다. 


과천로는 남태령 길이 협소하고 구불구불하여 고개를 넘기가 무척 힘들었고 장마가 오면 많은 백성들이 동원돼 보수작업을 해야만 다닐 수 있었다. 따라서 정조는 모친 회갑연을 위한 화성행궁 행차를 계기로 시흥로(금천로)를 개설토록 하였다. 하지만 당시 정조가 정도(正道)였던 과천길을 버리고 시흥로를 새로이 만들어 행로를 바꾸게 된 이유에는 또 다른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영조 조에 사도세자의 처벌을 주장했던 노론의 총수이자 영의정이었던 김상로의 무덤이 과천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천남쪽 찬우물 터에는 정조가 음용했다는 우물이 있고 그 윗 산에 묘가 2기 있는데, 곡담과 석물을 갖춘 묘가 정승 김약로의 묘이고 아래 묘는 신원을 알 수 없다. 이곳에 대한 일화는 김상로의 묘가 함께 있었다는 설과 당초 김약로 묘만 있었다는 설로 나뉘어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정조가 항상 쉬어가던 과천인근에 김상로 형제의 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아비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解冤)하기 위해 떠나는 능행길 인근에 놓인 김상로의 묘가 보기 싫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다고 한다. 당시 역사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목숨을 잃은 1762년(영조 38) 9세에 불과했던 세손 정조는 하루아침에 죄인의 아들이 되어 주변에 적의(敵意)와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다행히 영조는 즉시 세손을 동궁으로 삼아 보호하려 했지만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놓은 노론벽파는 연산군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전례를 두려워하여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며 세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저지하였다. 궁지에 몰린 영조는 세손을 요절한 큰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동궁의 지위를 지키게 하였다. 



시간이 흘러 여든이 넘은 노쇠한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하자 노론의 영수인 홍인한, 김상로가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들어 세손을 반대하고 나섰다. 영조는 홍국영으로 하여금 김상로를 비롯한 노론 핵심세력을 탄핵하도록 한 후 대리청정을 성사시켰다. 


이때 영조는 세손에게 "특히 김상로는 너의 원수이다."라 알려주고 정조가 대비해야할 세력을 분명히 지적하며 군사권을 넘겨줘, 불온한 세력에 대비토록 함으로써 장차 왕위를 승계할 힘을 미리 실어주었다. 82세 영조가 승하하자 노론의 끈질긴 방해를 무사히 넘긴 정조는 1776년 왕위에 오르며 영조를 이간질해 사도세자를 죽게 한 김상로의 관작을 추탈하였다.  

    

현재 과천시 갈현동에 있는 묘지에는 김상로의 형인 김약로의 무덤만 남아있고, 실제 김상로 묘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24-27)에 초라히 방치돼 있는데, 묘는 비명조차 갖춰져 있지 않고 몇 기의 묘가 함께 있어 어느 묘가 김상로의 묘인지 알 수 없다한다. 


영조 조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까지 올랐던 김상로의 묘가 현재 신원조치 알 수 없는 무덤으로 남아있는 것은 정조즉위 후 묘가 훼손될 것을 염려해 모두 철거했다는 설에 기인하고 있는데 미뤄 짐작해보면 정조 재위시기 과천현 찬우물 마을에 위치해 있던 묘를 남몰래 화성 밖으로 이장하고 철저히 흔적을 지우기 위해 묘비조차 남겨두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사진출처] 사진작가/ 임성환     

[참고문헌]

✓ 과천문화원 (www.gccc.or.kr)> 문화재> 비지정문화재  

✓ 경인일보 - 발행일 2015-05-12 제18면 “우리고장의 역사/안양 만안교” 

✓ 위키백과 (https: ko.wikipedia.org) > “김상로”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 www.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나경언의고변사건(羅景彦─告變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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