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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May 17. 2016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09)

과천에 남아있는 향촌유적(上)


과지초당    

   

과천은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4년간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곳이다. 청계산 끝자락에 옥녀봉이 오늘날 기억되는 이유는 추사(秋史) 가문과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양재동 양재대로 우측 트럭터미널 앞 삼거리에서 고개를 지나 바로 좌측 길로 들어서면 원주암 마을(注岩洞)을 알리는 원주암 표석을 볼 수 있다. 


죽바위가 있는 원주암 마을을 조금 지나면 돌무개 길을 끼고 과지초당이 자리하고 있다. 2013년 과천시는 과지초당 옆에 추사박물관을 개관하여 김정희의 학예사상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과지초당은 추사의 생부인 김노경이 1824년(순조24) 한성부판윤(현 서울시장)에 머물던 시절 과천에 마련한 별서(別墅)로 13년간 기거했던 곳인데, 당시 숲과 정원이 빼어나고 연못이 아름다운 경관을 갖춰 추사가문의 전성기를 상징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추사일문의 몰락과 함께 과지초당은 퇴락했고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가 2007년 과천시가 한옥2동을 복원하여 1856년(철종 7) 추사서거 151년 만에 되살아났다. 과지초당 입구에는 항아리를 묻어 우물을 만들었다는 “독우물”이 조성돼 있어 추사와 관련된 과천유적지로서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184 (추사로 78)

김정희는 19세기전반 실사구시를 제창하고 청나라 고증학의 정수(精髓)를 정확히 간파했던 학자였다. 그는 조선조의 훈척(勳戚)가문으로 경주김씨 김노경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백부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819년(순조19) 문과에 급제한 추사는 1826년 암행어사가 되어 비리에 연루된 현감 김우명을 파직한 일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경주 김씨에 대한 안동김씨의 질시와 함께 김우명의 탄핵이 있었다. 


이일을 계기로 추사일문은 정치적 모함에 빠져들며 급기야 김노경은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었다. 이후 귀양에서 풀려난 김노경이 몇 년 뒤 사망할 때쯤 추사는 형조참판에 올랐으나, 김우명의 끈질긴 탄핵으로 1840년(헌종 6) 제주에 9년간 유배돼 헌종말년에 풀려났다. 이후 친우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돼 1851년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고 1년 뒤 과지초당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시기는 안동김씨가 득세하던 시기였기에 추사는 정계에 복귀하지 못한 채, 선친 묘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며 학예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 생을 마쳤다. 그는 독창적인 추사체를 창안한 서예의 대가(大家)이자 금석학을 학문의 반열에 올려놓은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김정희가 과천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부친이 초당을 조성하면서 부터였다. 이곳은 청계산과 관악산을 끼고 있어 청관산옥(靑冠山屋)으로도 불렸다. 당시 김노경은 청(淸)학자인 등전밀(鄧傳密)에게 보낸 서찰에 과지초당을 소개했는데 “저는 노쇠한 몸에 병이 찾아들어 의지가 갈수록 약화되는데 직무는 여전히 번잡해서 날마다 문서에 파묻혀 있습니다. 


요사이 한양 가까운 곳에 집터를 구해 조그마한 집을 하나 마련했는데, 자못 원림(園林)의 풍모를 갖췄습니다. 연못을 바라보는 위치에 몇 칸을 구축해 과지초당이라 이름 하였습니다.”라고 언급하였다. 김정희는 부친이 별세(헌종 4)하자 부묘를 과지초당인근 청계산 옥녀봉중턱 검단이골에 안치하고 묘막에서 3년 상을 치른 뒤 이후에도 초당을 자주 찾았다. 


[검단이골]은 돌무개 남쪽 골짜기의 옛 지명으로 작은 저수지가 있는 곳이라고 하니 현재 주암지(注岩池) 인근으로 추정해 볼 뿐이다. 이후 김정희는 10년간의 제주, 북청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1852년(철종 3)부터 4년 뒤 서거할 때까지 과지초당에 머물렀다 한다.



유배를 마친 추사는 가을날 초당으로 되돌아온 버거운 마음을 “秋日重到瓜地草堂(추일중도과지초당)”을 통해 다음과 같이 시로 전하고 있다. “문을 나서니 가을이 정히 좋아, 스님과 더불어 애련함을 다시 견디어 내네. 가물가물한 삼봉 빛은, 어언간 다섯 해 전이로세. 푸른 이끼 낡은 집은 그대로 늙어가고, 붉은 잎 점차 숲을 곱게 물들이네. 동서로 떠돈 적이 하도 오래라, 산속에 저문 연기 잠기어 가네.”     

 

추사는 만년(晩年) 서거하기 두 달 전 쓴 대련(對聯)을 통해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은 [大烹高會]라는 구절을 남겼다.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의 의미를 보면 [좋은 음식은 익힌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최고에 만남은 부부와 아들딸 그리고 손자라네] 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간결한 문체이다. 


과지초당 안채 툇마루 기둥 위에는 대팽고회 2구절을 새겨놓은 주련(柱聯)이 걸려있는데, 이를 음미해보니 욕심 많은 인간의 본성에 일침을 가하는 동시에 진정한 행복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대팽고회] 여백에는 “此爲村夫子第一樂上樂(차위촌부자제일낙상낙) 雖腰間斗大黃金印(수요간두대황금인) 食前方丈 侍妾數百(식전방장 시첩수백) 能享有此味者幾人(능향유차미자기인), 爲杏農書(위행농서) 七十一果(칠십일과)”라고 적혀있다.


"이것은 촌부의 최고에 즐거움일세. 비록 허리춤에 커다란 황금인장을 차고, 호화로운 밥상에 시중드는 하녀가 수백 명 있다한들, 능히 이 맛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리오. 살구농사를 위해 쓰다. 일흔한 살 과천노인"이라고 적었다. 이렇듯 김정희 호는 추사(秋史) 외 칠십일과(七十一果), 과노(果老), 과농(果農), 과파(果坡), 과도인(果道人), 청관산인(靑冠山人) 등의 과천과 관련된 것들이 남아있다.


툇마루 기둥에 [대팽고회] 주련(柱聯)을 걸어놓은 과지초당

김정희는 조선말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토대로 모든 서가(書家)의 장점을 취해 독창적인 추사체를 창안한 서예가이자 학자로서 또는 최고의 예술가로도 평가되고 있다. 그는 유배 후 과지초당으로 돌아와 1856년 서거하기까지 봉은사를 오가며 거처했는데, 잠시 사찰에 머물 때 “판전(板殿)”이라 쓴 편액이 봉은사 전각에 남아있다. 


이때가 서도의 경지도 최고조에 달해 추사체의 유명한 작품 대부분을 과지초당에서 남겼다. 과천에 안장돼있던 추사 묘는 1937년 충남 예산군 선산으로 이장되었고, 선친 김노경의 묘는 1979년 후손이 화장 후 파묘해 갔다는 기록이 있는 반면 예산으로 이장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사진출처] 사진작가/ 임성환


[참고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www.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정희(金正喜)”, “봉은사김정희서판전현판(奉恩寺金正喜書板殿懸板)”  

✓ 과천시지> 인물> 과천속의 추사 김정희

✓ 한국방송통신대학 도서관> 소장자료> 秋史 金正喜 硏究: 淸朝文化

✓ 지역정보포털 모바일웹 (m.oneclick.or.kr)> 과지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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