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연재 기행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May 19. 2016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10)

과천에 남아있는 향촌유적(中)


과천향교 

     

향교(鄕校)는 중앙집권적 구조위에 왕경(王京)이 아닌 지방군현에 유학을 교육할 목적으로 공자와 여러 성현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운 조선시대의 지방교육기관이다. 


양민이상이 입학했으며 주된 교육은 시와 문장을 짓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과 역사를 배우는 경학(經學)이 명륜당(明倫堂)에서 강론되었고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재(東齋)에는 양반자제, 서재(西齋)에는 서얼과 평민자제가 기거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향교는 사립교육기관인 서원(書院)이 발달하면서 점차 위축돼 갔다. 


유림(儒林)은 향교를 통해 정치적주체로 인정될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15세기 말부터 사림(士林)들이 향촌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해 가며 그들 스스로가 교육과 교화를 행하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다. 거기에는 국가정치 운영에 불만을 느끼고 자신들이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목적도 내포하고 있었다.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81 (자하동길 18)

중종 초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기호사림(畿湖士林)들은 성균관향교 등을 통해 사림의 선현인 김굉필, 정여창 등을 배양하고 성리학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중종 14년 위훈삭제사건으로 빚어진 기묘사화로 주장이 좌절되면서 별도의 서원을 설치해 그 노력을 계승해 나갔다. 


서원은 송대 주자(朱子)가 설치해 명대까지 성행하였는데 조선에서는 1543년(중종 38) 주세붕(周世鵬)이 경상북도 영주 순흥면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연 것이 효시였다. 서원은 초기에 선현을 받드는 것이 중심기능 이었으나 퇴계 이황의 노력으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이후 계속 서원이 설립돼 향촌사회에서 교육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기반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향교는 점차  우수한 교생이 모여들지 않았다. 향교가 시들해진 또 다른 이유는 16세기 초반부터 군역을 면제받으려는 부유한 양인들이 교생으로 입학하면서 교생수가 크게 늘어나 향교의 교육기능이 저하됐던 까닭도 있었다.



당시 향교 교생은 군역의 혜택이 있었기에 양인들은 기를 쓰고 교생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양반들이 향교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향교가 교육과 사회교화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교생의 사회적 인식도 떨어지면서 새로 생겨나기 시작한 서원이 향교의 기능을 대신해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서원의 수는 16세기 후반 사림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며 급증해 17세기 후반에는 200여개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은 붕당정치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각 붕당(朋黨)들은 서원건립을 통해 여러 곳의 사림과 연결을 이뤄나가며 성균관과 서원의 연계를 통해 중앙정계와 연결고리를 만듦으로써 자파세력 확장을 이뤄내려고 했다. 


이를 위해 각 붕당의 영수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강학(講學)활동을 전개했다. 이로써 서원은 사림들의 교제장소와 향촌사회의 운영기구로서도 기능을 했던 것이다. 과천향교는 1398년(태조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됐다고 한다.


교육공간인 명륜당(明倫堂) 전경

정종 2년에 소실돼 태종 7년에 중건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전소(全燒)돼 다시 세웠다가 1639년(인조 16) 중건하였다. 본래 위치는 과천관아 동북2리(문원동)에 있었으나 향교 터가 좋지 않아 등과유생이 없다는 이유로 1690년(숙종 16)에 과천현감 황이명이 관아서쪽인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1군 1향교 원칙에 따라 시흥향교, 안산향교가 폐지되고 과천향교로 통합되었다. 이후 1959년 시흥군에 편제되어 시흥향교로 개칭됐다가 1996년 다시 과천향교로 복원되었으며 현재 향교는 1975년 중수(重修)하였다. 


향교초입 홍살문에서 시작되는 돌계단은 3줄을 이루고 있는데 옛 예도(禮度)에 따르면 계단을 오를 때는 우측, 내려올 때는 좌측계단을 이용해야하며 중앙계단은 신(神)의 계단이기에 함부로 오르내리면 안 된다고 해설사가 전해준다.


향교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교육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그 뒤편 내삼문에 통과하면 제사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이 있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교생들이 수학(受學)하던 명륜당은 정면 세 칸이던 것을 좌우양측으로 한 칸의 측실을 덧대어 증축했다고 한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 전경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에 겹처마로 되어있다. 대성전 문묘(文廟)에는 공자와 맹자 등 중국의 5성(五聖)과 송조 2현(宋朝 二賢) 및 우리나라 최치원, 설총, 정몽주, 안유,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 동방 18현인(賢人)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전적(典籍), 노비와 책 등을 지원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 기능만이 남아있다.  봄가을인 음력 2월과 8월 초정일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내며 매월 초하루, 보름에는 분향례를 올린다고 한다. 


과천향교는 조선시대 유생들의 유교정치이념과 학문적 성향을 보여주는 지역문화재로 옛적 향교가 있던 문원동(文原洞)은 마을에 향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지고 있다.



[사진출처] 사진작가/ 임성환

[참고문헌]

✓ 과천문화원 (www.gccc.or.kr)> 과천의 문화> 문화재> 지정문화재> “과천향교”  

✓ 과천시지> 문화유산> 문화제자료> 과천향교

✓ 한국학중앙연구원 (www.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향교”, “서원” 

매거진의 이전글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0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