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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May 24. 2016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11)

과천에 남아있는 향촌유적(下)


보광사  


보광사(普光寺)는 과천시 갈현동에 있는 사찰로 조계종 교구인 용주사의 말사(末寺)이다. 사찰은 과천종합청사와 도로하나를 사이에 두고 좌측 비탈길을 올라 나지막한 언덕 숲에 가리어져 있어 밖에서는 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통상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여러 채의 전(殿)이 배치되는데 그 안에 모신 보살에 따라 각기 불전 이름이 붙여진다 한다. 보광사 중심에는 대웅전으로 불리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자리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산 126-21 (교육원로 41)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부처가 사는 깨끗한 세상이라는 정토를 의미하며 극락정토(極樂淨土)라고도 한다. 따라서 예로부터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정토신앙이 뿌리내리면서, 사찰 중심인 극락보전은 아득히 먼 서역에 있다는 극락세계를 법당으로 옮겨온 곳이라 할 수 있겠다. 


보광사는 발굴된 유물로 보아 신라 때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그 연혁이 전해지지 않아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946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고 절 이름도 다시 지어 보광사로 불리고 있다.



넓다란 사지(寺址)에는 극락정토와 설법전(說法殿), 명부전(冥府殿), 새로 지은 종각탑 등이 있고 유물로는 [목조여래좌상]과 [문원리 삼층석탑], [석조보살입상] 등 귀중한 문화재가 경내에 산재해 있으며, 일반 사찰과는 달리 도심 속에 위치해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해 보인다. 


계단을 딛고 극락보전에 오르니 멀리 파란하늘과 맞닿은 관악산줄기 연봉(連峰)들이 갓 피어난 오월의 연록색채를 드리우고 있다. 평일에 찾은 보광사는 차분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띠고 있기에 잠시 중생의 고업(苦業)을 내려놓고 무상(無相)에 잠기고픈 평온함이 깃들어 있는 곳이었다.


▷ [목조여래좌상]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62호 



보광사의 극락보전 중앙에는 목조여래좌상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 이곳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은 금칠이 되어있어 마치 금불상처럼 보이지만 속이 나무로 만들어져 더욱 희소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목조여래좌상]은 전체적으로 둥글고 얼굴이 갸름하여 편안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곳 불상은 고개를 약간 수그린 채 항마인상(降魔印相)의 자태에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틀고 앉아있다. 반쯤 뜬 눈과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작은 입 그리고 늘어진 귀에서 부처의 자비로운 모습을 느껴본다.



불상의 뚜렷한 삼도(三道) 목주름이 18세기 이후의 불상처럼 어깨에 움츠리듯 붙어있지 않은 형태이기에 조선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 불상은 원래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 봉안돼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여주로 옮겼다가 1991년경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 [문원리 삼층석탑]  경기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39호



보광사 경내의 삼층석탑은 수수한 느낌에 석탑으로 문원리에 인접한 관문리의 옛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후기의 석탑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작품이라 하는데, 약 1.7m 높이 석탑은 시멘트로 된 기단 위에 단층 기단과 3층 탑신(塔身)을 이루고 있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조합이 불균형적이고 치석(治石) 수법이 고르지 못하다하여, 불교계가 안정되지 않았거나 그 교세(敎勢)가 약화됐던 시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층 탑신석에 문비(門扉)와 자물쇠 표현은 통일신라 말기 석탑양식이라 하는데 조각기법이 조잡하고 간략화 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삼층석탑 관련 자료에는 “지대석 안상의 조잡하고 불균형적인 수법, 부연이 마련되지 않은 판석형 갑석의 치석 수법, 옥개석의 평박한 인상, 옥개받침의 간략화 된 처리 등은 이 석탑이 고려 중·후기 이후에 건립되었음을 보여주지만, 석탑의 기단부에 보이는 섬세한 안상형 장식과 1층 탑신석에 문비와 자물쇠를 새긴 점 등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석탑양식이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문원리사지 석조보살입상]  경기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77호



석조보살입상은 관문리 사지(寺址) 또는 문원리에서 보광사 창건 시에 3층 석탑과 함께 옮겨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살입상은 고려 초기 민간인에 의해 제작된 석조보살입상으로 2.4m에 달하는 거대한 돌에 선각으로 새긴 입상(立像)이다. 


자연석에 앞모습만을 간략하게 선으로 새긴 방식으로 조각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함을 더하고 있다. 전면만을 선각한 보살입상은 둥근 얼굴에 가는 눈과 코는 양각하고 입은 음각하였는데 전체적으로는 평면적이다. 


둔중해 보이는 보살의 머리에는 후대에 얹은 것으로 보이는 둥근 보개(갓)를 쓰고 있으며 구분이 안 되는 짧은 목에 3줄의 삼도(三道)를 표현했는데, 이는 번뇌 그리고 고통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석조보살입상]은 납작한 얼굴과 좁은 어깨, 빈약한 체구, 서툰 옷 주름 선에서 권위나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며 지방화 된 독특한 불상양식을 보고이고 있다.  



 인덕원 터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 2동

과천을 중심으로 옛길을 따라 향촌유적을 연재하며 마지막으로 과천과 맞닿아 있는 인덕원(仁德院)을 둘러보았다. 인덕원은 조선시대 과천현에 포함돼 있던 곳으로 지금은 과천시, 안양시, 의왕시의 분기점으로 교통망이 사방으로 통하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내시들이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환관이라 하여 궁중에서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높은 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그들이 한양을 떠나 이곳에 살면서 주변에 어진 덕을 베풀었다하여 인덕이라 칭했는데 이곳에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원이 설치되며 인덕원(仁德院)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 옛날 양원, 퇴계원, 사리원 등의 원(院)은 조선중기까지 관리들의 숙식처가 설치돼 있던 곳으로 인덕원은 조선 초기부터 공무여행자들이 이용했던 교통요충지로 알려져 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의 기록에도 정유(1597년) 4월(음력) 초사흘에 인덕원에서 쉬어갔다는 내용이 있으며, 조선후기 원행정례에는 정조가 현륭원 참배 시 1789년(정조 13) 10월 5일 과천행궁에서 경숙(經宿)한 후 이튿날 인덕원을 지나 수원으로 향했고 5차(1793년) 행차에는 인덕원을 지날 때 인근에 있던 부노(父老)들을 접견하고 그 노고를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덕원은 원이 폐지된 조선후기부터는 자연적으로 가겟집들이 생겨나 주막거리로 불릴 만큼 이용자가 많았다. 따라서 조선후기에는 상서면(동안구청) 관내에서 제일가는 부촌이었으나 광복직전부터 빈촌으로 전락된 후 1980년대부터 다시 부상해 현재 관양동관내에서 땅 값이 제일 비싸다고 한다. 


현재 인덕원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원로들에 의하면 “인덕원 터” 표지석이 세워진 주변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2016년 2월부터 석 달에 걸쳐 “옛길 찾아가는 향촌유적” 원고를 써가며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행차 길과 각 행궁에 얽힌 사연들을 정리해 보았다. 


가능하면 독자의 이해를 돕고 기록의 정확성을 확인코자 유적지 곳곳을 찾아보며 글을 작성했지만, 연재를 마감하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번 기회에 화성행궁을 함께 정리하지 못한 점이다. 다만 나의고향 수원에 대한 화성유적탐방은 다른 기회 다음 글을 이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여운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 丙申年 오월 스무 사흗날



[사진출처] 사진작가/ 임성환

[참고문헌]

✓ 과천문화원 (http: gccc.or.kr) > 과천의 문화> 문화재> 지정문화재> 보광사  

✓ 과천시지> 문화유산> 문화제자료> 보광사

✓ 과천시 갈현동주민센터 (http: gccity.go.kr)> 가볼만한 곳> 보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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