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6월 제주탐방은 4박5일의 빠듯한 일정을 강행하며 현지에서 직접 숙소를 정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않던 불편함과 시행착오를 겪으며체력적으로 힘들었던 점이 많이 있었지만, [9코스]가 비교적 짧은 구간이라는 점에 힘을 얻어 일행은 마음을 굳게다지며 마지막 올레길을 나선다.
대평포구
나흘간 쌓인 피로를 접어두고 7시 50분 자그맣지만 정겨워 보였던 [대평포구]를 출발해, 말들을 방목할 때 몰고 다니던 길을 뜻한다는 몰질(馬路)을 따라 걷다보면 절벽위에 드넓은 초원인 [박수기정]이 나온다. [몰질]은 작지왓(돌밭)이 깔린 경사 길로 다양한 야생화 군락과 함께 좁고 척박한 옛길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주상절리가 잘 발달된 [박수기정]
옛적 몰질은 눈물과 한숨이 서린 고난의 길이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조공을 위한 말을 키우기 위해 제주전역에 열(十)개의 [목마장]이 설치됐었다. 현재 [몰질]이 있는 "하원공동목장" 일대는 팔(八)마장으로 지정됐던 곳으로 옛날부터 상산(上山) 방목을 했던 곳이다.
빨간 소녀 등대
그 옛날 가뭄으로 물이 부족할 때면 팔마장(八馬場)에서 키우던 말을 월평 서남쪽 바다인 “머내”에서 마르지 않는 용출수 샘물을 먹였는데, 이때 많은 인력이 동원돼 백성들의 고충이 컸다고 한다.
상산 방목장인 [하원공동목장]
[몰질]은 그 옛날 용출수로 말을 끌고 가던 길이요, 박수기정에서 키운 조랑말을 이웃마을인 대평포구를 통해 공마(公馬)로 진상(進上)할 때 이용하던 거친 길이었다. 세월이 흘러 옛 시절 말이 다니던 길이 지금은 사람과 차가 대신하고 있다.
작지왓(돌밭)이 깔린 [물질] 경사길
전 세계 100여 나라를 다녀왔다는 "한비야" 여행작가는 세상에 [제주올레]만한 길이 없다고 극찬하며 박수기정을 올라가는 [몰질]이 특히 멋진 길이라고 했다. 그녀는 “여행은 돈과 명예 등 계급장을 다 떼고 오감(五感)을 사용해 한발 한발 자기발로 걷는 여행이 가장 화려한 여행”이라며 경험을 전한 바 있다.
울창한 숲 언덕길
이렇듯 몰질은 올레길 제9구간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제주가 숨겨놓은 손꼽을만한 비경(祕境) 중 한곳이었다. 몰질의 경사길이 끝나는 곳에 오르면 울창한 숲 언덕길이 이어지며 정상에 이른다. [박수기정]은 [올레 9코스] 초입에 위치한 [대평포구]에서도 바라보이는 주상절리가 잘 발달된 해안절벽이다.
대평포구에서 바라본 [박수기정]
[박수기정]이란 바가지로 마실 물(박수)이 솟는 절벽(기정)이란 뜻으로 옛적 사람들이 벼랑 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절벽위에서 "두레박"으로 길어올려 마셨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제주올레길은 대부분 해안을 따라 바다를 끼고 삶을 이어가는 어민마을 인적(人跡)의 숨결이 머물러있지만 이곳은 130여m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그 아래가 자갈 해안인지라 인위적인 시설물을 찾아볼 수 없다.
옛 고려시대 [박수기정] 위에서 품질 좋은 제주 말을 키워 몰질을 거쳐 [대평포구]에서 배에 실어 원나라로 보내기 위해 이 길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잠시 박수기정에 머무는 동안 주상절리를 타고 거슬러 올라오는 바닷바람에 더위를 식히며 드넓은 바다를 향해 영혼을 던져본다.
박수기정에서 내려다 본 [대평포구]
아쉬움을 뒤로하고 볼레낭을 뜻하는 보리수 나무가 우거진 길로 들어선다. [볼레낭길]을 걷다보면 간이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국토 최남단인 마라도와 송악산 등을 볼 수 있다.
구부렁 쇠문을 지나 월라봉(月羅峰) 초입에 이르자 이쯤에서 트레킹을 멈추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진다. [9코스] 초입부터 연속해 이어지는 오름으로 지친가운데 200m를 오르는 길이 쉽지 않았지만 전망대에 오르면 곳곳에 아름답게 펼쳐질 멋진 풍경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구부렁 쇠문
이어 안덕면 [월라봉] 일제 동굴진지에 도착하는데 월라봉 상단부 주변에는 총 7개 동굴이 있다.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제주도를 전진 기지로 정해 [모슬포] 일대에 동굴, 해안동굴, 땅굴, 포대, 격납고 등 군사시설물을 구축하고 6~7만 명의 군인을 주둔시켰다고 한다.
일제 동굴진지
[월라봉]에 대한 지명유래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달이 떠오르는 오름"이라는 설이 유력해 보인다. 긴 능선을 이룬 낮은 지형을 뜻하는 [진모루 동산]과 [자귀나무 숲길]을 지나 도착한 [황개천]은 안덕계곡 물줄기가 굽이굽이 꺾이면서 내려와 바다까지 이어지는 천이다.
황개천
먼 옛날 이곳에 물개들이 나타나 울었다고 해서 붙어졌다는 [황개천]을 지나 동화동에 들어서면 그 지명처럼 듬직한 폭낭(팽나무)들이 즐비해 있다. 마을 안으로 걷다보니 마침내 화순항이 보이며, 10시 50분 바다와 용출수의 만남이 이뤄진다는 화순마을 [금모래해변]에 다다른다.
화순금모래해변
[9코스]는 구간거리가 짧아 쉬울 것으로 여겼지만 70%가 산길로 이어지는 쉽지 않은 코스였다. 닷새간 이어진 강행군으로 지칠대로 지친 일행은 오후 한라산 남서쪽 [영실계곡]과 [윗세오름] 철쭉산행을 포기하고 쇳덩이처럼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화순금 모래해변식당”으로 들어가 시원한 제주막걸리로 쌓였던 피로를 풀어본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1시경 주인장 안내로 식당뒤편으로 들어가 차디찬 계곡담수에 발을 담그니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유중유한(遊中有閑)이 이어진다. 그간 돌아본 올레코스는 걷는 길 가운데 푸른 바다에 펼쳐진 빼어난 풍광과 용암이 만들어낸 절경이 널려있기에 어느 곳을 가도 풍경화(風景畫) 아닌 것이 없는 곳이었다.
이번 여정은 자동차를 타고 내달리는 여행에서 맛볼 수 없는 감동을 최소한에 비용을 들여 온몸으로 직접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체험이자 감춰졌던 제주속살을 재발견할 수 있는 멋진 여행이었다. 이순(耳順)을 넘긴 세월에 실로 많은 것을 체득하며 살아왔지만 이토록 오랜 길을 걸어본 경험은 처음인 듯하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걸었던 올레길 대자연은 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도시의 삶에 찌들었던 지난세월은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지 걷고 걸으며 되뇌었다. 닷새간의 일정은 무리한 강행군 이었지만, 내가 서있는 아름다운 길 위에서 젊은 날 누리지 못했던 삶에 여유가 전해주는 편안함을 느껴볼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배낭여행이라는 것이 걷다가 힘들면 그냥 주저앉아 쉬면되고, 시간 내 목적지에 못가면 버스라도 타고가면 족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간 투박한 구두끈을 조이며 폐부(肺腑) 깊숙이 감동을 전하는 방랑자가 되어 걸어보았던 길을 기억에 남겨두고, 또 다른 곳으로 향하는 감동을 찾아 나서길 희망해본다. - 丙申(2016)年 칠월 열 이튿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