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의 3대 문명
■ 라틴아메리카 행선기(行先記)
정년퇴직 후 장기간 계획했던 남미여행은 지구 반대편의 제일 먼 지역이기에, 긴 여행시간과 만만치 않은 비용으로 쉽게 결정하기 힘든 일정이었다. 따라서 퇴직이후 7년간을 망설여 오다가, 더 이상 나이 들기 전 체력이 남아있는 때 잉카문명과 그 유적지가 남아있는 페루여행을 결행하기로 했다.
라틴아메리카 패키지여행은 통상 6개국(멕시코, 쿠바, 페루,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을 20일 이상 여행하게 되는 데, 이 경우 국가 간 이동 시 장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인천공항에서 브라질 동남부 이과수(Iguazu) 공항까지 직행할 경우 항공기가 하늘에 떠있는 시간만 무려 29시간에 이른다.
남미 북서부 해안에 위치한 페루의 수도 리마(Lima) 공항까지도 24시간 비행거리이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 비행은 중간에 급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직항이 불가하며 도중 미국공항에 머물러가야만 한다. 고민 끝에 오랜 기간 계획해온 장기여행을 포기하고 단기일정으로 바꿔, 가까스로 아내의 동행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번 남미여행은 6박 9일을 택해 미국에서 페루까지 가장 단거리 항로를 갖춘 애틀랜타공항에 도착해 하루를 머물며 시내를 둘러보고, 오후 리마로 출발하는 코스를 택해 엿새간 페루역사 유적지를 찾아보기로 정했다. 이제 가능한 한 쉬어가는 여행코스를 찾아나서는 것을 보면 어느덧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 듯 여겨진다.
□ 라틴아메리카의 3대 문명
중세기까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았던 인디언은 현재 태평양해역 섬들에 산재해있는 폴리네시아(Polynesia)인으로 여겨지는데, 그들의 선주민족(先住民族)은 약 3~4만 년 전 베링(Bering)해협을 넘어 아시아에서 건너왔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들은 빙하기가 끝난 후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이 연결돼 있었기에 이동이 가능했다.
아메리카 북부지역에 흩어져 살던 인디언(Indian)들은 BC 12,000년경 아메리카 중앙의 유카탄 반도까지 진출했다. 따라서 중앙아메리카에는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인디오(Indio)들이 화전(火田)농업을 일구며 정착하였다. 기원전 1,000년경 멕시코연안의 부족이 주변을 지배하며, BC 1~2세기경에는 멕시코 중앙고원에 테오티우아칸 문명과 유카탄 반도에 마야 문명이 성립되었다.
이후 Teotihuacan 문명이 소멸하고 새로운 세력들이 부침(浮沈)을 거듭했으나, 13세기 멕시코 북부에서 중앙으로 내려온 아즈텍 인들에게 정복되었다. [아즈텍(Aztec) 왕국]은 14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까지 현재의 멕시코시티에서 흥성했던 제국이다. 마야문명의 영향을 받았던 ①아즈텍문명은 중앙고원에서 패권을 잡고 멕시카(mexica)라 칭했다.
②마야문명은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메리카에 케추아족들이 세운 고대문명이다. 그들은 피라미드 신전을 세워 태양과 달의 신을 숭배했다. 특히 달력과 천문학을 발달시키며 도시국가를 건설해 유카탄 반도전역에 마야문명을 확산시키며 약 600년간 번영해 왔지만 10세기경 극심한 가뭄으로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남아메리카에서는 안데스산맥을 중심으로 몇 개의 왕국이 번영을 누리다 소멸했다. 기원전 2,500년경 중앙아메리카를 넘어온 인디오들이 거주하기 시작해 BC 1,250년 안데스산맥 지역에는 여러 개의 부족사회가 형성되었다. 이후 200년대에는 안데스 북쪽에 [모체(Moche) 왕국]과 남쪽에는 [나스카(Nazca) 왕국]이 출현하였다.
나스카는 거대한 지상화(地上畵)를 그린 문명으로도 유명하다. 8세기 초 [우아리(Uoareee) 왕국]이 안데스산맥 일대의 부족을 통일했지만 12세기경 다시 여러 부족으로 갈라졌다. 14세기 후반 페루 쿠스코를 중심으로 잉카가 왕국을 세워,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초에 걸쳐 콜롬비아 남부, 볼리비아, 칠레 북부까지 지배하는 광대한 [잉카(Inca) 제국]을 건설하였다. (▶1392년: 조선왕조 개국)
③잉카문명은 안데스산맥을 주축으로 하는 남아메리카 서부의 주요 영토를 제국의 일부로 편입하며 1세기 동안 황금기를 누렸던 문명이다. 하지만 번영을 누렸던 중남미 문명은 스페인의 잔인한 침략으로 1533년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Atahualpa)의 죽음과 함께 멸망하고 지금은 일부 유적만이 남아있다. (▶1533년; 조선조 중종28년)
□ 라틴아메리카의 발견 배경
유럽 남서부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에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는 고대 여러 기독교왕국이 있었는데, 프랑스와 경계하고 있는 북쪽에는 [아라곤 왕국], 중앙에는 [카스티아 왕국]이 있었고 반도서쪽 해안에는 [포르투갈]이 있었다. 오늘날 스페인은 아라곤 페르난도 왕과 카스티아 이사벨라 여왕이 결혼하면서 스페인 왕국이 탄생하였다.
당시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침공하지 않은 이유는 15세기 포르투갈은 항해 왕 엔리케(Henrique)로 인해 바다에서 전성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잦은 침략에도 포르투갈은 항해도구 발명 등으로 이미 아프리카에 많은 식민지를 갖고 해상을 주름잡는 강대국이 돼있었기에 스페인도 무시 못했을 정도였다.
15세기 이탈리아 탐험가였던 콜럼버스는 해도(海圖)제작에 종사했는데, 당시 수학자로부터 지도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를 하면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1484년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왕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제안했다 거절당하자, 스페인 여왕을 찾아가 항해지원을 요청했으나 또다시 거절되고 말았다.
이후 1492년 [카스티아] 이사벨 여왕은 [아라곤]의 왕과 함께 협력해 에스파냐 남부 [그라나다 왕국]을 장악한 뒤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며 스페인을 통일하자, 해외진출에 관심을 갖으며 콜럼버스가 제시했던 해양탐험 계약조건을 승인했다. 15세기부터 16세기 유럽인들은 새로운 항로와 미지의 나라를 찾고자 바다로 나갔다.
유럽인들의 탐험 동기는 13세기말 유럽사회에 커다란 호기심을 촉발시켰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7세기부터 13세기 중반까지 동서무역 교통로 중앙을 지배하고 있던 강력한 이슬람국가 세력권 때문에 마음 놓고 내륙을 관통하기가 쉽지 않았다.
중세기 낙후된 문화를 벗어나지 못했던 유럽인들에게는 중국의 비단과 같은 색다른 문물과 산에서 캐내는 검은 돌인 석탄 및 여러 등급으로 발행돼 통용되던 지폐 등이 새롭고도 선진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낯선 세계의 다양한 산물과 이색적인 문화야말로 유럽인들에게는 신비한 세계로 비춰졌을 것이다.
또한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유럽인들에게는 느끼함을 덜어주는 후추와 같은 인도의 향신료 구매가 절실하였다. 따라서 동방과 직접 접촉하는 길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일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국가에 큰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는 지중해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지중해 무역 상인들로부터 소외됐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북아프리카에 세력을 뻗어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점령한 이슬람 세력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포르투갈은 이슬람지역을 배제하며 아시아로 가고자 했고, 새로운 항로개척으로 초래될 경제적 이득을 갈망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이미 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하였다. 신항로개척에 앞장선 포르투갈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기 위해 1487년 디아스(Bartholomeu Diaz)를 보내 이듬해 희망봉을 발견한 뒤, 1492년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대서양을 횡단해 서인도제도(諸島) 에 도착한 것이다. (▶1492년; 조선조 성종23년)
콜럼버스는 스페인 여왕의 후원을 받아 동방의 나라 인도를 찾아 항해를 떠났으나, 항로(航路)가 서쪽으로 벗어나 카리브 해(海)의 섬 쿠바와 아이티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서인도 항로 발견으로 아메리카대륙은 유럽인들의 경제활동무대가 되었고, 스페인이 주축이 된 신대륙 식민지경영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비슷한 시기 포르투갈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마침내 1498년 인도 캘리컷(현재의 코지코드)에 도달함으로써 인도에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아시아에 무역거점을 설치하게 되면서 이후 이슬람 상인을 제치고 동방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 콜럼버스의 악행(惡行)
스페인 이사벨여왕은 2척 선박과 거액자금을 내주며 죄수들을 면죄(免罪)해주는 조건으로 승무원들을 모집케 했다. ①1492년 8월, 첫 항해 출범으로 그해 10월 카리브 해 섬나라에 도착해, 그곳이 인도라고 생각했던 콜럼버스는 히스파니올라 섬(아이티)에 40여명을 남겨 식민경영을 지시한 뒤 이듬해 귀국해 “신세계 부왕”에 임명됐다.
당시 그가 가져온 금은제품이 전 유럽을 놀라게 하면서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두 번째 항해는 ②1493년 17척 배와 1,500명의 대 선단을 꾸려 본격적으로 금을 캐기 위해 나섰다. 콜럼버스는 이곳에 이사벨라 시(市)를 건설하고, 카리브 해 원주민들에게 금 채굴 부역명령과 공납을 강요하며 인디오들을 살육하고 노예화했다.
하지만 이 항해에서 에스파냐로 보낸 산물은 금 대신 노예들이었기에 1496년 본국으로 돌아온 콜럼버스는 문책을 당했다. ③1498년 세 번째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는 트리니다드 토바코를 발견했으나 식민지 내부반란 등에 행정적 무능으로 송환된 뒤 ④1502년 네 번째 항해도중 온두라스 만(灣)에 있는 베이 섬 근처에서 인디오들이 탄 배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유카탄 반도에 살고 있던 마야인과 유럽인의 최초의 만남이었다. 이로써 콜럼버스 또다시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귀국했다. 2007년 국내 상영됐던 영화 아포칼립토(Apocalypto)는 스페인 침략직전에 유카탄 반도를 무대로 산재해 있던 인디오 부족과 강대한 마야 왕국을 그린 영화이다.
1504년 이사벨 여왕이 사망하자 콜럼버스의 지위도 몰락하며 2년 뒤인 54세에 사망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콜럼버스 업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서인도 항로의 발견이며, 실제 본격적인 중남미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은 콜럼버스 사후(死後) 에스파냐 인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이후 아메리카대륙은 금은보화를 강탈하는데 혈안이 된 유럽 침략자들의 무법천지로 변해, 인명살상과 전염병(천연두)의 전파로 원주민이 일시에 150만 명이 죽기도 했다. 이로써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찬란한 문명의 파괴현상을 불러왔다. 이를 계기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도 신대륙과 식민지경영에 합류하며 유럽인들의 정복역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