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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Jun 08. 2017

라틴아메리카 行先記(02)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브라질


□  브라질만이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까닭  

    

1498년 포르투갈의 인도 신항로 개척 후 동방으로부터 차와 면직물이 전해지고 신대륙으로부터 담배, 감자, 코코아, 옥수수 등이 전래돼 유럽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당시 인도의 후추는 금보다 비쌌기에 포르투갈은 많은 부를 축척하게 됐다. 이에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발견(1492년)한 신대륙에서 금을 찾아내 채취하기 시작했다.     


15세기 후반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신대륙을 놓고 패권을 다투었는데, 이들은 탐험지역들에 대한 영토분쟁을 피할 목적으로 스페인 서북부 토르데시야스에서 바다 국경선을 정한 협정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포르투갈은 대서양을 통해 동쪽 아시아와 동인도 제도로 진출할 수 있었고, 스페인은 서쪽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해야만 했다.     


이 조약은 스페인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귀국한 즉시 로마 교황에게 새로 발견한 지역인 아메리카와 그 서쪽 모두가 스페인의 영토임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한 데서 비롯됐다. 1493년 교황은 아프리카 서단 카보베르데 섬 서쪽 480㎞ 지점을 경계로 서쪽지역 신대륙은 스페인이, 동쪽지역은 포르투갈이 지배토록 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한 경계선

하지만 포르투갈은 조약이 불공평하다 주장하며 교황칙령에 강하게 반발했다. 양국은 1년쯤 협의를 거쳐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1494년 경계선을 약1,500㎞ 떨어진 지점으로 이동키로 결정하고, 1506년 교황에게 재가(裁可) 받았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열강들은 강한 반발을 보였지만 두 나라의 압력에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브라질 지역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사실상 스페인의 핀손이었다. 그는 1499년 4척의 배로 탐험대를 이끌고 카나리아 제도를 거쳐 1500년 1월에 브라질 북동부 페르남부쿠 주에 도착했다. 이시기 포르투갈도 1494년 바뀐 양국조약에 의해 자국영토에 포함된 아메리카 신대륙의 탐험을 시작하였다.      


1500년 3월, 포르투갈 선장에 임명된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은 15척 배에 군인과 선교사 및 승무원을 포함한 1,500명을 이끌고 신대륙으로 향했다. 카브랄의 함대는 항해 중 항로를 이탈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한 달반 만에 바이아 주(州) 포르투세구루(Porto Seguro) 연안에 도착해 신대륙인 브라질의 존재를 확인했다. 


브라질을 빌견한  카브랄

이로 인해 아프리카 서단에서 1,500km 떨어진 해상에 그어진 가상의 한 줄로 브라질이 포함됨으로써, 수세기 동안 진행된 경계선 서쪽지역 탐험은 포르투갈이 남아메리카 내륙의 광대한 지역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확고한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 5위의 광활한 대륙인 브라질은 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는 나라가 되었다. 


□  라틴아메리카의 브라질 경계확장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포르투갈은 인도와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해 후추를 독점했고 고추 등 동양의 특산물을 대량 들여왔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금과 상아, 노예와 다이아몬드 등을 들여오면서 포르투갈은 엄청난 부를 이어갔다. 반면 스페인은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전역에 식민지배를 강화할 수 있었다.


1501년 포르투갈 왕실은 최초로 브라질 해안답사를 위한 원정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중 포르투갈의 유일한 식민지였던 브라질은 마야나 잉카와 같은 고도의 문명이 없었다. 이에 귀금속 대신 붉은 염료원료인 파우-브라질(Pau-Brasil) 나무만을 싣고 귀환하면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에게 매력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다. 


브라질의 인디오 

브라질 국명은 파우-브라질 나무를 채취하던 사람을 일컫는 브라질레이루(Brasileiro)에서 유래했다. 당시 포르투갈은 흑사병으로 인구가 총 200만 명에 불과해 브라질 개척에 투입할 노동력도 없었다. 하지만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금과 은 발견소식이 끊이지 않자 왕실은 브라질에서의 귀금속 발견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1503년 2차 원정대를 파견했지만 울창한 열대림으로 탐험이 불가능했기에 브라질을 방치된 상태로 남겨두었다. 포르투갈은 광활한 브라질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2개의 원정대를 군인으로 구성하고,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인디오를 노예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수많은 흑인들을 노예로 들여왔다.  


아즈텍 왕국을 멸망시킨  코르테스

제1원정대는 조약에서 정해진 브라질 북동부 내륙으로 침투해 금 발견과 인디오 포획을 목적으로 활동했다. 제2원정대는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도망간 흑인노예 추적과 식민 사업을 주목적으로 하면서, 1600년대 중반쯤에는 페루 안데스산맥까지 이르며 남미내륙의 광활한 영토를 포르투갈 령(領)으로 확장해갔다.

    

1519년 포르투갈 마젤란 5척 함대에 270여명의 선원을 이끌고 출항해 3개월 뒤 리우데자네이루 만(灣)에 도착한 뒤 태평양으로 가는 통로를 찾아 남하해 을 거쳐 1521년 필리핀 세부 섬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 부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1척의 함대에 18명 생존자만 살아남아 1522년 에스파냐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같은 해(1521년) 스페인의 코르테스는 11척의 배에 100명의 선원과 500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유카탄 반도로 들어가 [아즈텍(Aztec)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로써 광활한 멕시코지역이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16세기까지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철기시대 초기쯤의 해당하는 문명단계에서 반농, 반수렵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Apocalypto  Still Image

이어 남아메리카의[ 잉카 제국]을 침략한 사람은 스페인의 피사로였다. 코르테스가 [아즈텍 왕국]을 멸망시킨데 자극받은 피사로1531년 185명의 병사를 이끌고 잉카제국의 황제를 잡아 잉카인들에게 몸값으로 안데스산맥에서 나온 금을 약탈하고 태양신에서 크리스트교로 교화시키며 1533년 스페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피사로 병사에게 저항하는 잉카족

중세기 이베리아족에 의해 정복된 남아메리카 대륙은 총 17,840,000㎢로 지표면(地表面)의 약 3.5%를 차지하고 있다. 남아메리카는 아시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에 이어 4번째로 큰 대륙으로, 이중 브라질 영토는 8,514,877㎢로 남미대륙의 약 48%에 해당한다. 미국의 총면적 9,826,675㎢ 중 알래스카 주를 제외한 미국본토는 7,987,629㎢이다.   

   

따라서 브라질의 영토는 미국 본토보다 더 큰 편으로, 멕시코를 제외한 남아메리카 대륙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각자 반씩 나눠 점령한 셈이다. 미국영토 동서지형을 남북지형으로 바꿔 돌려놓은 형태가 광활한 브라질이다. 일부지역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됐던 17세기말에도 브라질은 여전히 포르투갈 왕조의 재정을 돕는 식민지 위치였다.      


□  라틴아메리카의 분리 독립

     

16세기 초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신•구교의 종교전쟁이 전개되며 루터 파의 신교가 인정되게 되었다. 이로 인해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함대가 오스만제국 함대를 제압하며 스페인은 무적함대로 불리게 됐다. 1580년 아프리카 북부전쟁에서 포르투갈 국왕이 죽자, 바다의 무적함대로 최강에 해양국이 된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60년간 통치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스페인은 1588년 엘리자베스 1세 영국함대에 패하면서 점차 해상권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스페인의 소홀한 틈을 타 포르투갈은 독립전쟁을 벌리고 영국의 지원으로 1640년 왕권을 복원시켰으나, 영국의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식민정책을 인도양에서 대서양로 바꿔 브라질과 아프리카의 식민 지배를 강화해갔다. 



이로써 대서양 연안의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무역과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전쟁을 벌였다. 이후 1808년 나폴레옹 군대가 리스본을 진격하며 이베리아 반도를 유린하자,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 “Rio de Janeiro”로 피신해 왕국의 수도로 정했다. 이때 브라질 식민정책에도 큰 변화가 생기며 브라질은 왕국지위를 갖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침략으로 라틴아메리카는 프랑스에 굴복할 것인지 스페인 왕실에 충성해야 하는지 크게 동요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 1822년 본국으로 돌아간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을 예전처럼 지배하려 하자, 브라질 사람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고 결국 브라질에 남아 있던 포르투갈 황태자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한편 스페인에 종속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본국에서 직접 파견된 백인(Peninsulares)들의 무역정책이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Criollos)들이 주장하는 자유무역과 갈등을 빚으며 반감이 극대화 됐다. 특히 부를 축적했지만 권력에는 접근하지 못하는 끄리오요스(Criollos)들은 "나는 스페인인이 아니고 아메리카 인이다.“라고 불만을 터트리며 저항했다.


1776년  북아메리카 미국이 독립을 이루자, 라틴아메리카도 19세기 초부터 독립운동이 펼쳐져 에스파냐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스페인 식민지 중 가장 많은 인구와 경제력이 집중됐던 멕시코는 성직자인 모렐로스(Jose Maria Morelos)의 투쟁으로 1821년 독립하였다. 


베네수엘라 출신 볼리바르(Simon Bolivar)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를 해방시켰다. 또한 페루의 보호자라 불리는 산마르틴(Jose de San Martin)도 독립혁명군을 지휘하며 스페인과 전쟁을 이끌어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를 해방시킴으로써 19세기 라틴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은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Extra Shooting                                                                      


아래 주소를 터치(클릭)하면, 영화Apocalypto」 Last Fight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2분55초)  

https://m.youtube.com/watch?feature=youtu.be&v=6bN4z4o0D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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