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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Jul 09. 2017

라틴아메리카 行先記(03)

사라진  잉카제국


중남미지역은 역사문명과 자연의 경이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낯선 여행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라 생각된다. 그중 페루는 고대 문화유산의 도시 쿠스코와 신기한 지상화가 펼쳐진 나스카를 비롯해 드넓은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는 이카가 있고, 신비로운 미스터리에 마추픽추를 만날 볼 수 있는 곳이기에 출발부터 설렘임이 가득한 나라였다.

     

중학3년이던 1970년 어느 겨울날 세운상가 한 분식점에서 사이먼 &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를 듣게 되었다. 당시 처음 들었던 곡은 우수에 찬 선율로 사춘기청소년의 정서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었다. 이후 대학시절 간혹 무대에 오를 때면 이곡을 불러보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페루잉카에 대한 호기심이 싹트기 시작했는지 모를 일이다.  



라틴어인 El Condor Pasa는 The Condor pass를 의미하지만, 잉카의 토속음악으로 슬픈 사연을 지닌 곡이다. 인디오들 사이에 전해오던 원곡은 잃어버린 자유에 대한 갈망과 향수를 콘도르에게 토로(吐露)하는 노랫말을 지니고 있다. 원래 콘도르는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뜻하는 잉카어로 안데스산맥에 서식하는 독수리를 뜻한다.


콘도르가 하늘과 인간을 이어 준다고 믿었던 잉카인은 영웅이 죽으면 콘도르로 환생해 자신들을 보호해준다 굳게 믿었다. 따라서 스페인 침략으로 잉카황제가 잔혹한 죽임을 당하며 나라를 잃게 되자 잉카인들은 황제가 하늘의 신을 상징하는 콘도르로 환생했다고 믿었 한다.



아픈 역사를 보듬고 살아 온 인디오들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원곡은 잉카제국이 몰락했던 옛이야기가 담긴 곡이었다. El Condor Pasa를 연주하는 잉카인들의 슬픈 사연에 감동을 받은 폴 사이먼이 잉카전통 곡에 영어가사를 붙여 발표한 곡이 불후의 팝 명곡으로 탄생된 것이었다.


□  바다건너 큰 나라

       

역사는 안데스문명의 마지막 왕국과 지배계층을 잉카(Inca)라 부른다. 잉카문명의 원류인 안데스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 푸나(Puna)라고 불리는 페루 고원지대에서 싹트기 시작했는데 당시 수장적(首長的) 사회조직의 성립과 옥수수농경 등이 확립돼 있었다. 그 후예인 잉카는 오늘날 페루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4천㎞에 걸쳐 북쪽 콜롬비아와 남쪽 칠레 북부지역을 포함한 여섯 나라를 거느렸던 제국이었다.  



페루의 여러 부족국가들은 15세기 잉카의 지배체계로 편입되었다. 잉카제국은 16세기 초까지 한 세기동안 중앙안데스 전역을 지배하며 콜럼버스가 중남미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왕국이었다. 제국의 군주는 사파잉카(Sapa Inka)라 칭했는데, 서양에서는 이 군주의 칭호를 따서 잉카제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잉카는 안데스산맥의 지세에 따라 4개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국명을 타완틴수유(Tawantinsuyu)라 칭했다. 옛 수도인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세계의 배꼽"이란 뜻으로 잉카인들은 쿠스코가 세계중심지이자 태양에 의해 빛나는 도시라고 믿었다. 잉카역사는 제1대 왕에서 14대까지를 구분해 전설기(1~2대), 군주기(3~8대), 역사기(9~14대)로 구분하고 있다.


주된 부족은 쿠스코와 코야오(Collao) 지역 및 페루연안에 정착한 부족들로 구성되었고, 그 밖에도 수많은 부족들이 잉카제국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잉카제국 최강에 정복자는 9대 왕이자 초대 황제인 파차쿠티 잉카(1438~1471년)로 남부 중앙고원의 광활한 지역에 주변부족들을 지배하며 교육을 통해 언어를 케추아어로 통일하였다.



파차쿠티(Pachacuti)는 잉카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케추아(Quechua) 족장에서 군주가 된 후, 최후 강력한 제국의 황제로 변신해 잉카의 황금기를 누린 그는 안데스의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존재였다. 태양의 신은 잉카의 숭배대상이었기에 잉카에 최고지도자는 태양의 아들을 의미했다.


태양의 아들 파차쿠티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드높은 안데스산맥 위에 하늘과 우르밤바 강줄기의 영적인 중심을 찾아 신성한 마추픽추를 건설토록 했다. 잉카인들은 해안과 안데스산맥 내륙에 두 갈래의 큰 도로를 만들어 활용했던 최고의 석공들이었기에, 험악한 산맥 마추픽추에 경작지 관개수로를 만들고 석조기술의 극치를 이룬 요새를 축조할 수 있었다.  

   

전해오는 여러 설화(說話) 중 파차쿠티의 이야기가 좀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1438년 북쪽 해안과 서쪽 정글을 정복하며 잉카제국을 건설한 파차쿠티는 수많은 노예를 전리품으로 거두어 1450년부터 1540년까지 90년간 공중도시를 세웠다. 마추픽추는 신기에 가까운 돌 다루는 솜씨를 지닌 잉카인들과 정복된 노예들의 피땀이 더해진 결과물 이었다.



당시 잉카는 화약과 바퀴가 없었는데 어떻게 20t이 넘는 돌들을 해발 2,400m 산비탈까지 옮겨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산의 바위에 징을 박아 그 틈새에 물을 흐르게 해 깼다거나 통나무를 밑에 깔고 옮겨왔다는 것 모두 추측일 뿐이다. 잉카인들은 파차쿠티가 죽은 뒤에도 그가 환생할 것이라고 믿고 공사노역을 밀어붙였다 한다.


노예들은 스페인군대가 쿠스코에 있던 파차쿠티 상징물을 불태우자 비로소 마추픽추를 떠났다고 한다. 이는 추측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분명한 것은 16세기 후반, 잉카인들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마추픽추를 버리고 더 깊숙한 오지를 찾아 들어갔거나  태평양 외딴섬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  사라진 잉카제국     


16세기 시작된 에스파냐의 남아메리카 탐험은 원주민의 약탈과 정복정책이었다. 그들은 이교도와 싸우는 성신(聖神)의 군대라며 칼을 뽑아 들었지만, 실제는 황금 병에 걸린 사람들이었다. 또한 기독교 전파(Gospel), 왕에 대한 영광(Glory), 황금 약탈(Gold) 등 3G 정책을 표방하며 많은 인디오들을 죽였다.    

  

스페인은 1519년부터 쿠바, 아이티, 푸에르토리코 등 서인도제도 여러 섬을 짓밟고 1521년 멕시코지역을 점령한 뒤 1524년부터는 온두라스 쪽으로 내려갔다가 별다른 소득 없이 다시 남아메리카 쪽으로 내려와 1533년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 무소불위(無所不爲)에 무력을 동원한 스페인은 1535년 이후 북아메리카로 진출을 꾀하였다.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후 에스파냐는 1517년 쿠바총독 벨라스케스에게 멕시코를 통치하며 탐험토록 지시했다. 하지만 인디오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그 휘하에 있던 코르테스(Hernan Cortes)가 병사를 이끌고 황금을 찾아 1518년 멕시코 원정에 나섰다.



그들은 3달가량 아즈텍(Aztec) 병사와 싸우며 마침내  아스텍 왕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벌거벗은 미개인들이 살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의외로 신전과 궁전을 높이세운 말쑥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당시 코르테스의 위용을 알아차린 아즈텍 황제는 순순히 성문을 열어주었다.   

  

성대한 환영을 받은 코르테스는 궁전 안에 성당을 세울 것과 금은보화를 요구했다. 이를 시기한 쿠바의 벨라스케스총독이 코르테스를 반역죄로 몰아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 하자, 이를 간파한 코르테스는 수십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총독이 보낸 군사를 역습해 승리를 거두었다.

     

1521년 테노치티틀란으로 다시 돌아온 코르테스는 인디오들이 반격을 준비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20명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적장을 죽인 뒤 왕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코르테스테노치티틀란의 이름을 멕시코로 바꾸고 에스파냐 국왕으로부터 총독 겸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코르테스가 멕시코를 정복했다는 소식이 스페인 병사들이 주둔해있던 파나마에 알려지자, 그곳에 머물던 용병출신의 상인 피사로(Francisco Pizarro)는 남쪽 저 멀리에 황금으로 가득한 땅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확인하고자 두 차례 잉카를 다녀왔다. 당시 잉카는 황제와 동생이 왕권을 놓고 싸우고 있었다.     

 

피사로는 스페인 국왕에게 잉카사정을 설명하며 잉카정복을 제안해 승낙을 얻었다. 1531년 3번째 잉카에 도착한 피사로와 동행한 신부는 이듬해 14대 황제 아타우알파(Atahualpa)를 내치기 위해 그에게 성경책을 주며 그리스도와 스페인 왕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피사로의 속내를 모르던 황제는 홧김에 성경을 내동댕이쳤다.     


순간 피사로 병사들은 광장을 피로 물들이며 황제를 볼모로 가둔 뒤 몸값으로 6천kg의 황금을 비롯해 엄청난 양에 금은보화를 받아냈다. 피사로에게 금은 빛나는 욕망이었지만, 잉카인들에게 금은 곧 태양을 의미했다. 황금은 대지의 신이 준 태양의 일부이고, 대지와 태양의 신은 모두 높은 곳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잉카황제가 성경을 내던진 사건은 그가 하늘과 땅을 통해 보고 믿었던 것만을 신으로 추종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태양신은 오직 하늘에서 만나야 한다고 믿었던 잉카인들은 하늘에 닿은 비밀의 도시 마추픽추를 잉카성지로 여겼을 것이다. 피사로가 잉카를 침략했을 때 인디오들은 그를 전설의 창조주 비라코차(Viracocha)로 믿었다.   

   

흰 피부를 가진 창조주가 돌아온다는 인디오의 믿음 덕분에 고작 185명의 병사뿐이었던 피사로는 7만의 병사를 지닌 잉카제국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1533년 피사로는 왕궁과 신전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불사른 뒤 아타우알파 황제의 목뼈를 부러뜨려 처형했다. 당시 스페인은 약탈한 금괴를 스페인으로 실어 나르는데 많은 고생을 했다.      


이로 인해 피사로는 해안가로 수도를 옮겼는데 그곳이 현재 페루의 수도 [리마]이다. 이후 잉카인들은 힘없는 왕인 망코 잉카(Manqu Inka)의 지휘아래 40년 동안 저항하였다. 1572년 마지막 왕인 투팍 아마루(Tupac Amaru)가 처형되자 광활한 잉카문화는 스페인군에 의해 짓밟히며, 안데스산맥 곳곳에 거미줄처럼 연결한 도로와 수로를 건설했던 찬란했던 문명은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  잉카를 떠난 후예들 

   

이스터 섬(Easter Island)은 폴리네시아 제도 끝에 해저 화산폭발로 생긴 섬으로, 남아메리카 칠레에서 가장 외딴섬이며 칠레서쪽에서 3,500㎞ 떨어져 있다. 수천 년 전부터 이 섬에 살고 있는 폴리네시아 원주민들은 이 섬을 커다란 땅을 의미하는 라파누이(Rapa Nui)라 불렀다.



노르웨이 인류학자 헤이에르달(Thor Heyerdahl)은 1914년 남태평양 외딴섬에서 생활하며 지구에서 사라진 문명의 유물을 조사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에 피어오르는 구름이 언제나 동쪽 수평선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곳 원주민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스터 섬에 머물던 헤이에르달은 원주민들이 언제부터 이 섬에 살았는지, 이들이 왜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만 살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어두워질 무렵 헤이에르달은 우연치 않게 섬 토박이 노인에게서 솔깃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옛날 우리조상은 바다건너 큰 나라에 살았다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섬으로 조상들을 이끌고 온 사람은 우리의 족장이자 신(神)이었던 티키였다오.” 노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전해준 “태양의 아들이자 위대한 폴리네시아의 족장 티키”에 대한 전설을 기억하고 있었다.



노인이 말한 바다 건너 큰 나라란 바로 남아메리카였다. 헤이에르달은 이 섬에서 페루의 문화, 신화, 언어가 폴리네시아 종족의 신 티키의 기원임을 증명하는 여러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일부 원주민들이 잉카인처럼 끈에 복잡한 매듭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도 알게 됐다.



그 후 10여 년간 폴리네시아 문명을 연구한 헤이에르달은 마침내 “페루 땅에 살던 사람들이 나라가 망하자 뗏목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폴리네시아의 외딴섬에 정착해 남아메리카에서 누렸던 문명을 다시 건설하면서 살았다.”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El Condor Pasa  합주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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