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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08. 2017

만추의 남한산성


 晩秋의 남한산성


퇴직 후 1년여 간 조선왕릉 기행문을 쓰면서 역사의 흔적이 배어있는 남한산성을 둘러보고 싶었다. 깊어지는 가을날 그간 미뤄두었던 그곳을 큰 아들의 제안으로 11월 첫 주말에 함께 돌아보게 되었다.


거주지인 과천에서 세곡동 헌릉을 지나 23Km를 달려 산성터널을 빠져나오니, 광주에 경계한 남한산성의 [남문]인 지화문(至和門)이 바로 나온다. 40분이면 닿을 가까운 거리에 역사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성곽으로 이어진 산책길을 따라 모든 이가 한 번쯤 들러보았을 역사의 숲길을 뒤늦게야 둘러보며 만추(晩秋)의 아름다움에 젖어드는 하루였다.


[지화문]은 선조 조(朝)에 남문과 동문을 수축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성문으로, 남한산성의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면서 이 문을 통과하였고, 1779년(정조 3)에 성곽을 개축하면서 지화문으로 불렀다 한다.

 

지화문(至和門)

남한산성은 독특한 구조로 설계되어 산 외곽은 산성(城)이 둘러져 있고 성 안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마을이 조성돼 있던 곳으로, 삼국시대부터 외침을 막아낸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왕조 때에도 몽고침입을 격퇴했던 [남한산성]은 우리역사에 치욕적인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선조 조인 16세기 말 중원대륙은 여진세력을 통합해 후금(金)을 건국한 누르하치가 강력한 북방세력으로 등장함으로서 명(明)과 청(淸)이 교체되는 큰 변화를 맞고 있었다.

 


명과 후금 간에 중립 외교정책을 폈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한 인조와 서인정권은 친명배금(親明拜金)의 정책을 고수하다 1627년(인조 5) 후금의 침략을 자초했었다.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천도하고 주화파(主和派)인 최명길의 강화주장을 받아들여 "형제 의(義)"를 맺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고 전란을 마무리 했었다.



하지만 1636년(인조 14)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 청태종이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제의해옴에 따라 인조는 청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척화파(斥和派)의 거두 김상헌의 주장을 앞세워 청의 제의를 거부함으로써 그해 병자년 12월 청은 10만 여의 군사를 이끌고 또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 피난길이 막힌 인조가 피신해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의 악조건을 견디며 청군과 맞서 47일간 항전한 곳이다. 丁丑年(1637년) 1월 1일 청태종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에 당도해 탄천(炭川)에 20여만의 청군을 집결시키면서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당시 성내에는 군사 1만3천명이 달포 간 지탱할 식량만 남아 있어  청과의 결전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기록에 의하면 정축년 정월(正月)에는 유독 혹독한 추위가 지속되어 추위와 허기에 병든 군사와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고 전한다.  



당시 왕자들이 피신해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 성문을 열고 한강상류 나루터인 삼전도(渡)로 나아가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태종을 향해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땅에 찧는 치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의식을 치루고 항복협정을 맺었다.


수어장대(守禦將臺)

남한산성에 있는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수어장대(守禦將臺)는 군의 지휘와 관측을 하던 누각으로 2층에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는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라 한다.

 

남한산성 동문

또한 남한산성 동문 안 북쪽 산기슭에는 목조단층 기와지붕에 현절사(顯節祠)가 있는데, 이곳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청의 선양으로 끌려가 순절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삼학사(三學士)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청(淸)에 항복하기를 반대하다 인질로 끌려가며 “가거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련만은,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라는 시를 남긴 김상헌도 1711년(숙종 37)부터 [현절사]에 함께 모셨다고 한다.  


현절사(顯節祠)

[심양]에 잡혀온 두 대신이 당시 주고받은 시를 보면 최명길이 “湯氷俱是水, 裘葛莫非衣 (끓는 물과 얼음 모두 물이고, 가죽 옷과 갈포 옷 모두 옷이라네)”라고 읊자, 김상헌은 “雖然反夙暮 詎可倒裳衣 (아침과 저녁이 뒤바뀐다고 해도, 치마와 웃옷을 거꾸로 입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화답해 전후(後)에도 극명한 인식에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봉암성 암문

17세기 당시 비통해 했을 인조의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남한산성]이지만, 만추(晩秋)에 거니는 산성의 산책로는 참으로 평온하고 한가롭다. 산은 높으나 가파르지 않고, 산성을 따라 이어진 숲은 인조의 번민(煩悶)만큼이나 가을 햇살아래 푸른빛이 바래있다.


일그러진 만용(蠻勇)으로 두 차례 전란을 자초했었던 패왕(敗王) 인조강화 교동도 유배지에서 전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폐왕(廢王) 광해군이 제각기 고뇌했을 시름에 깊이를 모처럼 함께했던 아들과 나누며, 낙엽 쌓인 남한산성 성곽 길을 차분히 걸어본다.  - 癸巳年 立冬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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