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이 기억 속에 사라져가는 1970년대 우리의 황금기 청소년시절. 그 시절은 해가 거듭 될수록 삶의 무게에 짓눌릴수록 더욱 그리워집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우리 모두에 아름답던 추억과 소중했던 그 기억들을 떠올리며 지난시절을 回想해 봅니다.
▮ 이야기 1976
2차 캠프 1975-08-05(火) ~ 08-09(土) : 짝넷 파트너와 몽산포
1975년 08월 06일, 연이어 콧노래를 흥얼대던 [동반 타락자]들은 새내기 파트너인 무용수 수준에 걸 맞는 놀이문화에 편승코자 구저분한 텐트를 물리고 시골집 민박을 정한 뒤 서둘러 바닷가로 나갔다.
[새내기 파트너]들과 해변으로 향하는 솔숲 길은 夢山浦 이름그대로 몽롱한 꿈길 같기도 했다. 이번 캠프를 통해 새내기 3명중 *영주에게 은근한 마음이 가있던 나는 바닷가를 보기보다는 함께 걸어가던 몽산포 숲길이 더욱 좋았다.
몽산포 솔숲길
당시 내 맘을 눈치 채지 못한 그녀에게 말을 걸어가며 혹시 속마음을 들키지 않을까 애써 시치미를 떼기도 했다. 거아도(居兒島)를 끼고 눈앞에 펼쳐진 아른거리는 섬들은 설레임과 함께 아름다운 몽산포 해변의 정취를 한껏 더해주었다.
모래 위를 거니는 아가씨들의 달콤한 속삭임이 금방이라도 들려올 듯 마냥 즐겁고 부풀은 마음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바닷가 굽이돌아 젊은 꿈을 싣고서, 백사장 은빛비늘 몽산포라 내 사랑.~ 그대와 마주앉아 불러보는 샹송, 희망의 꽃구름이 둥실 둥실 춤춘다.~ ♬
캠프일행 대다수 놈들은 이듬해 군 입대로 헤어져야 할 타락 동지였기에 동병상련의 아쉬움과 격한 열정의 뜨거운 가슴을 하얀 파도에 씻어내며, 삼삼오오 백사장에 둘러앉아 기타반주에 목청을 드높이다 어둑해진 땅거미 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꿈속에서조차 살기 좋다는 전설을 간직한 몽산포 첫날 밤. 시골토담집 대문 입구에 댓 자 멍석을 깔고서 팔랑대는 호롱불 심지에 어둠을 태워가며 타락한 악동들은 선남선녀의 탈을 쓴 채 짧은 여름밤의 추억을 여미기 시작했다.
빗소리 들리면 떠오르는 모습~ ♬ 당시 여름캠핑 합창 대명사였던 “긴 머리 소녀” 기타반주가 시작되면서 해 설핏한 낭만의 여름밤은 나름대로 조금씩 익어가고 있었다.
08월 08일, 설레던 몽산포의 며칠 밤을 뒤척였던 까닭에 평소 때면 늘어진 아침잠에 취해있으련만 이른 아침부터 새내기 파트너들의 재잘거림에 눈을 떴다. 까치집 머리를 한 채 밖으로 나와 보니 옅은 화장을 한 파트너들의 화사함이 아침햇살에 비치며 야릇한 기분이 느껴졌다.
이내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푸짐하게 차려진 아침식사를 끝낸 후 모두 함께 바다로 나갔다. 모래밭 위에 자리를 펼쳐 잡은 타락자들은 남녀 다름없이 황급히 파도에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정오의 태양이 달아오르자 새내기 파트너들은 무용으로 다져진 구리 빛 몸매를 위한 선탠을 시작했는데, 호기(好期)를 놓칠세라 *영주의 태닝(tanning)을 돕는다는 핑계로 수영복 뒤로 드러난 뽀얀 등허리에 썬오일을 발라주었던 몽롱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해질 무렵 백사장 지평선 위에 석양이 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낙조를 바라보며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기에 그녀와 함께 아름다운 노을의 세계로 갈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며 공허한 마음을 곧추세웠다.
해지는 몽산포에 머물며 차마 좋아한단 말을 못하고 돌아서던 순간 그녀 가슴에 저며드는 한 점의 노을이고 싶었다. 숙소로 돌아온 뒤 자정을 넘겨가던 남녀 타락자들은 어느 누구하나 지친기색 없이 즐거운 분위기에 빠져있었다.
그날 밤 까맣게 그을리며 타오르던 호롱불아래 홍안(紅顔)을 띄우며 상기됐던 녀석들은 새벽 내내 마음에 두었던 파트너의 방문을 빈번히 들락거렸을 것 같았다.
45년을 넘긴 지금까지도 후일담으로 꺼내는 친구들의 그 시절 무용담은 젊은 시절 타락자들의 달콤한 꿈속에서나 이뤄졌을 바램이었기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몽산포 민박집
그해 8월 17일 육군입대 확정통보를 받고는 싱숭생숭 심란한 마음에 [짝 넷]의 *용란을 학교 앞 [명다방]으로 불러내 마음이 끌려있던 *영주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뜻밖에 Y대 아이스하키를 하는 남친이 있다고 전해들은 순간 뒤통수 한방을 얻어맞은 충격에 문뜩 지나온 나의 모든 경험과 사연들이 부질없는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버리고 만 느낌이었다.
이듬해인 1976년 9월초, 나는 정처 할 수 없는 이월(二月)의 기한부 바람이 되어 밤마다 꿈속에서 조차 넘나들 수 없었던 철조망에 갇혀버린 채 젊음의 숨결이 가득히 묶여있던 향기 없는 꽃이 피던 곳에서 35개월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짧지 않았던 군복무 덕분에 그 오랜 세월동안 내면 속 깊이 앓고 있던 타락의 열병(熱病)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입대 전 기념사진 ('76년)
【Epilogue】
1976년 봄이 오기 전, 동반타락자 일부를 먼저 군에 보내놓고도 여전히 난 외로운 방랑생활을 하고 있었다. 2월 휴학을 한 뒤 9월 입대를 앞두고는 그해 5월 종로 지하다방에서 새로운 가시내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친구 얼마나 천방지축이었던지 그녀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노라 작심한 뒤 말괄량이 눈에서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협박과 회유를 강요했던 그때에도 나는 타락의 굴레에 홀로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버릇없던 무남독녀 가시내 눈탱이를 밤탱이가 되도록 쥐어박고 이촌동 아파트 앞까지 따라가 멍든 눈을 가라앉히라고 날계란 손에 쥐어주며 허세를 부렸던 나는 친구가 마련해준 [일영농장] 별장에서 속세에서의 마지막 여름캠프를 말괄량이 여친과 함께 놈들의 눈을 피해가며 새벽을 기다려 달빛아래 달콤했던 그 무엇을 즐기며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