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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Jan 09. 2018

추억 속에 사라진 세실극장


최근 뉴스를 통해 정동 세실극장이 폐관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싱그럽고 풋풋했던 내 청소년시절, 정동 길에서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곳이 세실극장이다. 유신(維新)체제 시절이었던 1976년 4월 개관하여 연극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정동 세실극장이 무술년 정월 42년 만에 문을 닫게 된 것이다.



1976년은 육군입대 소집통지를 받고 휴학을 한 뒤, 해병 또는 공군 통신병으로 지원키 위해 종로2가 전자기술학원을 다니던 해였다. 9월초 공군입대를 기다리던 그해 초여름, 지루함을 달래고자 연극을 하던 친구를 따라나서 한 극단의 연습장을 자주 찾았었다.


그해 7월쯤 세실극장 무대에 올려 진 연극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였는데, 친구를 따라다니며 담벼락에 연극포스터를 붙여보기도 하고 공연연습을 하는 유명 탤런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공연 일정이 잡혀있던 며칠간 세실극장을 매일 들락거리며 허드레 일들을 도왔던 기억이 아스라하기만 하다.



연극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대본은 순종적이고 무저항적인 인간들을 만들어내려는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 입원 환자들에게 계속해 정신병진단을 내리는 정신병원을 그린 미국소설을 연극화 한 것이었다. 당시 기억나는 출연배우는 임동진과 20살에 앳된 송승환이었다.


36년 세월이 지난 2012년, 푸르른 신록(新綠)이 내려앉던 5월 아내와 함께 추억의 정동을 찾아 세실극장을 들러보기도 했다. 사방을 돌아보면 가득한 것이 호기심이요 팔을 뻗으면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했던 20대 호기(浩氣)는 사라졌지만, 40여년 세월을 간직했던 세실극장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며 무상한 세월의 공백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 곳이다.


2012년 5월 찾아본 세실극장

1976년 정동 대한성공회 별관에 세실극장이 들어서게 된 것은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부닥친 성공회가 재정자립을 위해 1973년 회관을 짓게 되었다 한다. 따라서 성공회는 시청주변 대기업들이 주주총회 등을 할 수 있는 회의장을 만들어 나름에 임대수입을 기대했을 것이다.


당시 유신체제를 반대하다 해외로 추방된 김중업씨에게 설계를 맡겼으나 건축도중 명동국립극장이 없어진다는 소식에 용도를 공연장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덕수궁에 인접한 세실극장은 대한성공회 교구장을 지냈던 “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에 이름을 따라 지었으며, 1976년 개관 당시 소극장으로는 가장 큰 규모인 320석 객석을 갖춘 곳이었다.



개관공연은 1976년 4월 극단 [산하]가 올린 『유령』이었으며 7월에는 나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공연되기도 했다. 이후 1977년∼1980년에는 [연극인회관]으로 사용되며 이곳에서 5차례 대한민국연극제가 열리기도 했다. 1981년~1997년까지는 극단 [마당]이 마당세실극장으로 운영해 왔다.


세실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소극장으로 연극무대가 거의 없었던 1970년~1980년대 가난한 연극인들과 볼거리에 목말랐던 시민들에게 소중한 공간이었다. 이후 1990년대 들어서는 변환기를 맞아 통기타 가수들의 공연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당시의 관객들은 객석을 모두 채우고 통로에 앉아 김광석의 공연을 기다리는 설레임이 가득한 공간이기도 했다.



뜻밖에 IMF 외환위기를 맞아 폐관처지에 놓이게 되자 1999년 극단 [로뎀]에서 극장을 인수했고 후원기업의 이름을 극장 앞에 붙이는 Naming Sponsorship 제도(제일화재 세실극장, 한화손보 세실극장)를 도입해 2012년까지 운영해왔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연극중심이 대학로로 옮겨가면서 더욱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


2013년부터 김민섭 씨어터오 대표가 세실극장을 인수해 운영해 왔다. 같은 해 서울시가 서울  근현대 문화유산 중 가치가 있다고 평가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했으나 실질적인 공연장 임대료지원을 받지 못해 5년이 지난 2018년 1월 7일 폐관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극장대표는 월 1,300만원의 임대료를 개인이 감당하기에 무리였고 관객이 줄면서 적자누적이 심화돼 운영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다. 서울연극협회가 세실극장을 공공극장으로 운영키 위해 대한성공회와 협상했지만 임대료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해 임대를 포기하게 된 것이다.


부채꼴 모양의 세실극장은 김중업 건축가 작품으로 역사적, 문화적 측면에서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아 왔지만, 극장위치가 대학로가 아닌데다 임대료마저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서울시의 공연장 임대료지원 사업대상에서도 배제됐다고 전한다.


2018년 1월 폐관된 세실극장과 덕수궁 돌담길

마지막 무대인 『안네 프랑크』 공연을 끝으로 폐관하는 세실극장은 정동도심지에 위치한 연극전용극장의 역사성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역사적 문화공간을 보전하기 위한 서울시의 실질적  관심과 적극적인 노력이 미흡해 결국 안타까움 속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성공회는 세실극장을 사무실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세실극장보다 한 해 앞서 1975년 개관했던 삼일로 창고극장이 2015년 폐관했다가 서울시의 10년 장기임차로 2018년 초 재개관 앞두고 있다하니 그나마 자그만 위안으로 삼아볼 뿐이다.  - 무술년 정월 초여드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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