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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28. 2015

백두산 등척기(06)

민족 정기가 서려있는 용정


■  백두산 등척기(登陟記) - 민족 정기가 서려있는 용정 


07월 18일 우리민족이 독립운동을 했던 발자취를 찾아보는 북간도의 일정인 용정(龍井)으로 향한다. 당초 7시 30분 출발 예정이었지만 일행 중 입담이 뛰어난 한 동기의 일방적인 요구로 출발이 1시간 늦춰지며 여유를 갖고 란경호텔 주변을 둘러보며 아침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10여개 노상 유황온천탕을 갖춘 란경호텔

백두산 산문을 떠나 3시간 40분쯤 내달려오자, 차창너머로 언덕위에 일송정이 보인다. 용정 시내에서 4km 정도 떨어진 비암산(琵岩山) 낮은 언덕에 정자 모양의 수려한 소나무에 "一松亭"이란 이름이 붙여졌는데, 일제가 나무를 고사시켰던 것을 1991년 한국인사 후원으로 옛 자리에 소나무를 복원하고 정자를 신축했다 한다.


비암산 언덕  정자 앞 푸른 일송정

용정(룽징)은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중부에 있는 도시로 연길에서 남서쪽으로 약 20 km 떨어져 있는 [북간도]를 대표하는 도시이다. 용정에는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이 시내를 가로 질러 용문교 다리 밑으로 흐른다.


용정(龍井)은 구릉지대 를 이루어  넓은 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고, 세전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대부분 옥수수가 심어져 있지만, 벼를 심은 논과 감자, 인삼 밭도 있다한다. 용정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문화유적지가 산재돼 있기에, 벡두산의 관광기지로도 큰 몫을 하고 있었다.


용정중학교 정문 앞  상가아파트  

12시 경, 룡정(대성) 중학교에 도착해 학교 앞 도로변 건물들을 살펴보니 연변 만에 독특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간판 위로는 한글이 적혀있고 그 아래는 한자로 적혀있거나, 간판 좌측은 한글로 우측은 한자로 표기돼 있어, 양좌음우(陽左陰右)를 따르는 조선족의 주체의식에서 동일 민족임이 절로 느껴진다.



용정에는 1908년에 세워졌던 명동서숙(明東書塾)을 비롯한 신흥학교와 윤동주를 대표하는 룡정(대성) 중학교 등, 민족교육을 위해 설립된 학교들이 있다 전한다.


용정중학교

특히 [대성중학교]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 교육 산실로 윤동주를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이다. 민족시인 윤동주는 실제 은진중학교를 다녔다고 하는데, 이후 대성중학교와 통합됐다 전한다.


용정중학교 윤동주 동상

현재는 용정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조선족 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학교건물은 신관과 구관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구관 앞에는 윤동주의「서시」를 새긴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윤동주 시비

구 건물 2층 사적전시관은 윤동주 사진과 화보, 책자를 비롯해 일제강점기에 용정지역 역사를 보여주는 사료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에는 방문 흔적을 남기도록 방명록이 비치돼 있어 동기일행은 단체성금으로 각10불씩 각출해 60불을 기부했다.


방명록

대성중학교는 연변지역의 조선족사회에서 초기 공산주의자들을 키워낸 요람이었다 한다. 때문인지 동북 항일연합군 시절 김일성, 최현 등 사진이 걸려있고, 그밖에 윤동주 시인과 동창인 문익환 목사의 빛바랜 사진도 볼 수 있다.


1945년 해방을 6개월 앞두고 28세 젊은 나이로 요절한 윤동주는 간도이주 3세로,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유학 중 체포되어 생체실험 대상으로 고통 받다, 1945년 교도소에서 순국했다.



1948년 "서시"를 포함, 유고(遺稿)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가 간행됐다. 2층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1층에는,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윤동주 교실이 재현돼 있는데, 칠판에는 하얀 분필로 "서시"가 쓰여 있고 장작난로와 풍금도 전시돼 있다.



용정의 7월 태양은 몹시 뜨거웠다. 습기는 없는 날씨였지만 한낮 기온은 30℃를 방불케 하는 더위였는데, 때마침 점심이 냉면이라기에 일행모두 기대감에 부풀었다.


심심한 듯 뒷맛이 개운한 평양냉면은 거친 메밀 때문에 전분이 적절히 배합되는데, 메밀 배합이 많을수록 잘 끊어지는 것이 특징이며, 특히 여름보다는 말복이 지나 찬바람이 부는 시기에 제 맛이 난다.



용정지역 냉면은 세숫대야만한 유리 그릇에 칡 냉면 수준의 육수에다, 굵은 면발이 미끄러워 입안에서 면발이 겉도는 느낌이었다. 함께 제공된 탕수육도 튀긴 고기 부위가 질보다는 양에 치중한 듯 보여, 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용정에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명동촌]을 가는 길에는 두만강 지류인 해란강(海蘭江)이 보인다. 선구자를 떠올리게 되는 강인지라 왠지 대규모일 듯 싶었는데, 이 역시 강폭이 커 보이지 않는다, 용정 해란강 주변들판은 우리 민족이 간도 지역에서 처음 자리 잡은 곳이라 전한다.



명동촌(明東村)은 1899년 4가족이 이주해 정착한 마을 이름으로, 동쪽(한반도)을 밝힌다는 뜻이라 한다. 윤동주 생가는 1900년 조부가 용정으로 이주해 지은 가옥으로 1994년 연변대학에 의해 복원됐다. 이곳에는 윤동주 유년시절 공부방이 전시돼 있고 기념비와 시를 새겨놓은 각종 비석 등이 있다.


명동촌 윤동주 생가

이어 3.13 반일의사 묘소를 방문했는데, 이곳은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북간도의 민족 지도자들에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 중 희생된 열사가운데 14명을 안장한 곳이라 한다.


당시 연변에 살던 2만여 명의 조선인들이 서울에서 열린 3.1항거 소식을 접하고 일제에 대항해 조선의 독립을 외친 항일 독립운동 이었다 전한다. 용정은 우리겨레의 선구자들에 활동 유적이 많아 민족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반일의사 묘소

용정을 빠져나와 3시경 연길시내 몇 곳 매장을 들러본 뒤 장시간 마사지로 피로를 풀고, 노곤해 진 몸을 이끌고 국가가 운영한다는 코스모 가든의 전통요리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연변에 머무는 동안 제일 무난한 식사였다. 연변의 마지막 밤을 청요리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 술이라는 라오주(老酒)를 곁들여 흥겨움에 젖어들었다.


대종호펠

늦은 저녁 돌아온 대종(大宗)반점은 연길공항과 10분 거리에 있는 호텔로, 한때 ㈜대우에서 운영했던 호텔이라 한다. 연길지역 호텔에서는 한국 정규방송이 실시간으로 나온다. 출국일 연길방송 아침뉴스를 보니 7월 16일, 중국주석 시진핑도 연길시를 방문했다 전한다.


묘하게도 동기일행이 연길을 방문한 날짜와 겹쳐있었으니 이 또한 천일우(千載一遇)의 행운이 아니었을까 여겨본다. 북중 국경도시를 방문한 시주석이 연변조선 박물관과 농촌현장을 둘러보고 조선족 가옥을 찾아 격려하는 모습이 방영됐는데, 향후 한국과 북중관계가 어떻게 더 변화될지 자못 궁금했다.



30여년 세월을 함께했던 동기일행은 백두산 여정을 추억으로 남기고 07월 19일(일) 연길공항으로 출발했다. 3박 4일간을 되돌아보니, 백두산 천지의 경이로운 풍경과 신성한 정기를 담기위해 항상 잰걸음으로 앞서 걷던 *성환, 시종(始終) 먹거나 마실 때면 아쉬운 대로 나름에 통역을 자청했던 *상극이 돋보였다.



백두산 여행의 바람잡이이자, 분위기 메이커인 *한신, 걸쭉한 입담으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던 *재호 잔잔한 미소를 띠며 행락(行樂)수위를 통제했던 *진섭, 여행담을 놓치지 않기 위해 스마트폰 메모장에 부지런히 기록했던 , 일행 모두가 제 역할에 충실했던 것 같다.



이번 여행은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닌 옛 직장동기 6명이 모여 새로운 조화를 이룬 또 다른 여행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 이었다. 여행이란 결코 한가해서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이순에 들면서, 고금(古今)의 자취를 살피며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한 시대를 살아 가는 어른들의 사명이요, 기록을 통해 감회(感懷)를 남기는 것 또한 가치 있는 일 일것이다.  - 乙未(2015)年 七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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