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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Mar 30. 2018

하노이 기행(05)

하노이  씨클로(Xich lo) 관광


5월 1일, 이틀간 하롱베이 HERITAGE 호텔 투숙을 끝내고 하노이 출발을 위해 버스에 오른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4시간 30분 동안 가이드의 구수한 입담이 다시 시작된다.


60년~70년대의 월남전에 얽힌 비화들을 흥미롭게 쏟아내는 가이드는 30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한국정부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들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해 간다.


HERITAGE  HALONG  호텔

한국 경제발전을 위한 해외원조가 절실했던 당시 상황에서 국가재건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은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을 접견하고, 미국의 차관을 얻어내기 위해 베트남 파병까지 제안했었지만 케네디의 냉대 속에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듬해에 박대통령은 독일 대통령이 보낸 비행기를 타고 서독으로 달려가, 분단으로 갈라진 두 나라의 동병상련을 호소하며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3천만 달러의 차관을 빌려왔으며, 그때 광부와 간호사가 송금해온 1억 달러와 서독에서 빌린 종자돈이 대한민국 경제 기초를 닦는데 초석(礎石)이 되었다.


당시 광부들은 독일인 모두가 회피하는 1,000m 지하 광산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석탄을 캤고, 간호사들도 일반병원 간호업무가 아닌, 호스피스(hospice) 병동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며 사망한 환자들의 씻기거나 입관업무를 주로 담당했다는 말을 전해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후, 대통령내외가 탄광을 방문해 광부와 간호사들이 모인자리에서 그들을 위로하며 애국가를 부르자, 모두들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1964년부터 8년 여간 이어졌던 월남파병을 밑거름으로 1967년 포항제철과 울산공업단지 1968년 경부고속도 건설을 시작하게 돼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이루게 됐다며 열변을 토한다.


자신이 동남아지역에서 8년간 가이드를 하다 보니, 대한민국의 높아진 위상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전한다. 여행 중 젊은 가이드 덕분에 뜻밖으로, 가난했던 선배세대의 피눈물 나는 60년대 시절의 자화상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  하노이 시내 씨클로 관광 (40분: 옵션 20$)


하노이에 도착해 월남 쌀국수와 찹쌀 빵으로 점심을 마친 뒤 씨클로를 타고 시내관광에 나선다.씨클로(Xich lo)는 베트남의 아오자이, 쌀국수와 함께 3대 명물로 꼽고 있으며 90년대 베트남 국민들의 일반 교통수단이었으나 현재는 하노이 구도시의 관광요소로 남아있다.



하노이에는 씨클로라는 교통편을 흔히 볼수 있는데 자전거를 개조해 만든 것으로 하노이시내 주변풍경을 여유롭게 둘러보는데 제격이다. 하노이 중심가 모습은  한국의 80년대 모습이인 듯 보이는데, 자동차보다 오토바이가 주요 이동수단으로 엄청난 오토바이 행렬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하노이 인구 750만 명이 소유한 오토바이가 500만 대라고 하니, 가히 놀라울 정도이다. 베트남에서 자동차가격은 마티즈가 한국가격으로 2,500만 원이고 산타페가 7,500만 원으로, 근로자의 평균 임금이 24만원 이라하니  일반 서민들이 자동차를 구입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자동차대신 오토바이를 구입하는 것 같은데 혼다 오토바이 가격은 150만원 정도이다. 오토바이는 하노이 시내 도로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달리고 있는데, 특히 월요일 출근길에는 도로에 오토바이 헬멧만 보일정도라고 한다.  


도로변 즐비한 전당포

베트남인들의 생활필수품인 오토바이는 생산지와 배기량 및 종류에 따라 그 가격도 천차만별 이라 하는데, 눈에 띠는 한 가지가 그들의 문화만이 지니고 있는 오토바이 전당포다. 도로가에 "CAM DO"라는 간판이 100m쯤 줄지어 있는데 이 모두가 전당포였다.


쇠사슬로 바퀴를 묶어놓은 전당포 오토바이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베트남 정부는 늘어나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억제하기 위해 많은 관세를 부과하고 있고 휘발유도 ℓ당 1$이라 하니 물가가 꽤나 비싼 듯하다.


▶  바딘(BaDinh) 광장


바딘광장 안에는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이라는 두 가지 업적을 남긴 ①호치민 묘소가 자리해있고 광장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②호치민 박물관이 있으며, 그 옆에 ③한기둥 사원이 위치해 있다.



호치민 묘소


하노이중심 [바딘광장]의 대형 탑에는 베트남 영웅인 호치민의 유해가 유리관에 안치돼 있는데 건물자체가 단순하고 군 더덕이 없는 모양새로 공산국가다운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호치민은 베트남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기에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 항상 베트남인들이 이곳에 모여든다 한다.


호치민 묘소가 있는 대형탑

바딘광장은 호치민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곳으로 1945년 9월 2일 일제치하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했던 곳이다. 바딘은 이곳의 지명을 뜻하며, 지금은 전당대회장(국회의사당)과 공산당 서기장집무실 등 공산당 청사건물이 모여 있다.

     

공산당 청사

호치민 박물관


이곳은 호치민이 1954부터 1969년까지 살았다는 나무로 지은 주상(柱上) 가옥으로 그 앞에는  연못이 있고, 2층 구조의 집은 간소하게 꾸며져 있다.


호치민이 머물던 주상가옥

2층에는 나무 책상과 시계, 라디오 등의 애장품들이 예전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는데, 당시 최고 지도자의 가옥이라고는 생각할 수없는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던 호치민의 생활양식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그 밖에 호치민이 숨을 거둔 1층 숙소도 들러보는데 검약해 보이는 단출한 숙소가 돋보인다.


호치민의 서재

호치민은 사망하기 4개월 전 유언장을 인쇄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죽음이후 당 권력이 어느 한 사람에 집중되지 않도록 당부하고 당의 단결을 강조했다 한다. 호치민의 유언을 충실히 지킨 베트남의 지도자들은 항시 목민(牧民)을 향한 "호치민의 정신"을 이어갔다.


호치민 말년 숙소

호치민은 살아생전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를 따르던 국민들은 마음속에 그가 영원히 살아있기를 바라며 호치민의 모습을 유리관 속에 남겨둔 것 같다. 호치민 서거 후, 권력투쟁으로 베트남의 분열을 기대했을 미국은 머지않아 자신들의 생각이 큰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호치민의 관저

베트남 독립을 위해 척박한 환경에서도 젊은 인재들을 육성하면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즐겨 읽으며 평생 청렴하게 살았다는 호치민의 삶을 둘러보는데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참된 지도자의 인품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근무병 교대행렬

이곳은 과거 밀림지역 이었기에, 월남전 때에는 미군이 폭격을 피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공원으로 가꾸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고 한다.


한기둥 사원


이곳은 일주사(一柱寺)라고도 불리는 사찰로 1049년 연꽃을 본떠 1개의 기둥위에 불당을 얹어 지었다. 베트남 국보1호인 이곳 사원은 11세기 리타이통 왕이 왕자를 얻지 못해 기도를 하던 중 꿈속에서 관음보살이 연꽃 위에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본 뒤 궁궐 옆에 연꽃모양의 절을 짓고 기도를 올려 왕비가 왕자를 잉태했다는 곳이다.



이후 베트남 사람들은 자손들이 귀할 때 이곳을 찾아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사원은 매우 작아 보이지만 정방형 연못위에 떠있는 자태가 자못 우아해 보인다.


  수상 인형극


오후 5시 탕롱 수상 인형극장에 도착해 수상 인형극을 관람한다. 베트남 전통악기 연주로 공연 되는 인형극은 1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예술공연이라 하는데, 전통 인형극은 베트남의 농경 생활과 설화 등을 배경으로 연출했다고 한다.



40분간 이어지는 공연은 사람의 손으로 움직이는 인형들의 동작이 현란해 보이지만, 별다른 특징과 전해지는 감동은 크게 없어 보인다.


3박5일의 짧은 여행 동안 지켜본 베트남은 전통의상인 하얀색 아오자이를 입은 매력적인 여성, 소박한 쌀국수, 16.5평의 표준규격으로 지어진 개인주택, 도로를 꽉 채우며 달리는 오토바이의 행렬이 매우 인상적인 나라였다.



현재 베트남에는 금호 아시아나와 롯데 등 2,300여 개의 한국기업이 상주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대학졸업 후 한국기업에 입사하면 1,000$의 월급을 받게 돼 하노이 국립대학에는 한국어학과가 출세를 보장하는 인기학과라고 한다.


교민식당에서 저녁을 마친 후 하노이에서의 여행일정을 끝내고 23시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을 출발해 새벽 인천공항에 착륙하며 무사했던 그간의 여정에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  癸巳(2013)年 오월 초이튿날   


□  Extra Shoo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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