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항해개척
2017년 남미 페루를 다녀온 뒤 아프리카 원정을 계획하며 사파리가 적합한 지역을 놓고 많은 시간 망설여 왔다. 여행기간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바나 사파리를 위해 탄자니아 [세렝게티] 국립공원으로 갈 것인지, 이보다 작은 규모인 케냐 [마사이마라] 국립보호구와 함께 킬리만자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케냐 [암보셀리] 국립공원으로 갈 것인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여행계획 초기에는 탄자니아 [세렝게티] 면적이 케냐의 [마사이마라] 지역보다 10배가량 크기 때문에 Savanna Safari를 하기에 세렝게티가 적격이라 판단하였다. 하지만 한 달 넘게 자료를 정리하면서 아프리카 초식동물들이 우기와 건기에 따른 계절변화에 따라 물과 풀을 찾아 [세렝게티]와 [마사이마라]를 왕복하며 국경(國境)을 넘나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프리카 동부 인도양연안에 위치해 있는 탄자니아와 케냐는 전반적으로 열대성기후를 띄고 있지만, 분포지역과 계절에 따라 다양한 기후변화를 보이며 3~5월과 10~11월 우기에 머문다. 따라서 사파리를 위한 여행은 무엇보다 날씨가 매우 중요해 보인다. 또한 탄자니아 [세렝게티] 초원은 너무나 광활해 사파리를 하기에 오히려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탄자니아와 함께 “동물의 왕국”을 대표하는 케냐는 소설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킬리만자로의 눈]의 영화 촬영지이자, 킬리만자로 만년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에 더욱 케냐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곳을 가기위해서는 홍콩을 경유해 20시간 이상 장시간 비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에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 아프리카 역사
아프리카는 크게 보아 북부(지중해연안), 중부(사하라이남), 남부로 나뉘어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고 있다. ①북부아프리카는 고대 나일강 유역에 이집트문명 발상지를 이뤄 유럽과 서남아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중세기 아라비아 상인들은 사하라사막을 넘어 교역을 이루며 동아프리카 해안에 진출하는 등 끊임없는 교류가 이어졌다.
②중부아프리카는 원시적인 농경과 수렵을 했던 암흑대륙으로 아직까지 개발이 더딘 곳이다. 이 지역 대부분 부족들은 문자가 없었기에 유럽인들의 진출 전까지 알려진 것이 없었다. 미개(未開) 문명의 아프리카 대륙 중 ③남부아프리카는 15~16세기 포르투갈의 탐험으로 알려진 뒤 19세기 남아공에 다이아몬드 광맥이 발견되며 영국이 본격적으로 남아프리카에 개입하였다.
□ 아프리카 인종
아프리카 인종(人種)은 중부아프리카인 사하라사막 이남지역에서 약 10만 년 전, 북아프리카에서는 그보다 조금 늦게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아프리카 북부는 유럽계 민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토종 아프리카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중남부는 15세기 노예무역과 함께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아프리카 중남부 대륙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유럽인이 약 20%를 차지할 정도로 많고 그밖에 유럽인이 많은 나라는 짐바브웨, 잠비아, 나미비아, 모잠비크, 케냐, 세네갈 등이다. 아프리카 종족은 약 3천여 부족이 분포돼 있다.
【분포별 국가】
【종족별 특징】
□ 아프리카 항해개척
14세기 유럽인은 주식(主食)인 육류에 후추나 정향(丁香)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러한 향신료는 인도에서 수입해 오기 때문에 이슬람권 나라들을 거쳐 육로로 교역을 하다 보니 구입가격이 매우 비쌌다. 특히 유럽의 변방인 이베리아반도는 금을 건네며 향신료를 구할 만큼 힘들었다. 따라서 당시 유럽에서는 인도로 가는 뱃길을 찾는 일이 무척 중요했다.
유럽은 이미 13세기말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해 동방(東方)에 대한 호기심이 촉발되었다. 이후 100년이 지난 15세기 초부터 유럽인들은 새로운 항로와 미지의 나라를 찾고자 바다로 나갔는데, 이러한 탐험 동기는 이슬람국가를 견제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국가가 다른 곳에도 있다는 믿음과 향신료와 비단 등을 찾기 위해서였다.
특히 대서양 연안에 위치해 지중해 무역에서 소외돼있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이슬람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보이며 새로운 항로를 강렬히 갈망하고 있었다. 1418년 포르투갈 왕자 엔리케(Henrique)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해 인도에 이르는 항로탐험을 시작해 14번의 실패 끝에 1441년 아프리카 서해안에 닿아 약간의 사금과 흑인포로를 포르투갈로 끌고 왔다.
이들이 서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온 최초에 흑인노예다. 이후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holomeu Diaz)는 심한 폭풍우와 싸우며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도달해 이곳을 희망봉(Cape of Good Hope)이라 부르게 되었고, 10년 뒤인 1498년 포르투갈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 캘리컷에 도달함으로써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였다.
1492년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으로부터 스페인이 금을 캐내는 동안 포르투갈은 인도로부터 향신료와 차, 면직물 등을 들여와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뤘다. 1494년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 라틴아메리카를 스페인과 양분해 지배하게 되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열강은 강한 반발을 보였지만 두 나라의 막강한 힘에 이를 저지할 수 없었다.
□ 아프리카 유럽인 도래
뒤늦게 식민지정책에 뛰어든 영국과 프랑스는 남아메리카 신대륙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대륙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15세기 이후 아프리카는 서구의 노예무역과 질병의 전파로 인구가 줄어들어 국가성장이 지체되었다. 유럽열강의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에서 행해졌고 아랍인에게 수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아프리카의 인구감소는 정상적 국가성장이 멈춰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지만 유럽인을 통해 전해진 카사바(Cassava), 옥수수는 많은 인구부양을 가능케 했다. 이 결과 서아프리카 해안에 여러 국가가 건립됐는데 이 나라들은 유럽과 교역하며 미개한 아프리카를 벗어난 국력(國力)을 갖춰 19세기 후반까지 살아남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19세기 초 영국은 지난날의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이를 명분으로 아프리카 연안지역의 단속에 나섰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 내부국가들에 의해 노예가 매매되는 모순적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무렵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커피, 카카오, 야자기름” 등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을 대체할 수출사업이 등장하는 의외의 상황이 나타났다. 유럽세력은 19세기까지 아프리카 연안에서만 군사 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을 뿐 본격적인 식민지배는 이루지 못하였다.
유럽인의 식민지건설은 15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아프리카 열대기후와 질병이 유럽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이렇듯 아프리카의 혹독한 자연환경과 토착부족의 저항은 유럽인의 아프리카 진입을 좌절시켰다. 이 때문에 유럽 식민지배는 아프리카 연안의 소규모 도시나 주거환경이 좋은 남아프리카 지역에서만 성공적이었다.
이 시기에 포르투갈은 콩고와 모잠비크 해안을 영국, 프랑스, 덴마크는 서아프리카의 황금 해안, 노예 해안, 상아 해안, 후추 해안을, 아랍의 오만은 동아프리카 해안일대를 지배했다. 중앙 내륙지역까지 지배에 성공한 국가는 거주환경이 좋은 남아프리카를 최초 식민지화한 네덜란드와 16세기 이집트를 통치한 오스만 제국뿐이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부터 유럽은 데이비드 리빙스턴(英), 헨리 스탠리(美)와 같은 탐험가를 파견해 아프리카 내륙지도를 완성하며 아프리카 대륙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나라들은 유럽교역을 통해 총으로 무장하기도 했지만 유럽열강은 19세기 초 산업혁명을 통해 기관총, 야포 등 신무기를 사용함으로써 아프리카 부족들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