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Apr 21. 2018

무릉도원


 武陵桃源


삼월 내내 지루했던 차가운 기운이 가시는 듯싶더니 사월 중순에 들며 화사한 꽃들이 만개(滿開)하며 봄날을 완연케 하고 있다. 21세기 들어서 지구온난화로 이상 한파 등 기상이변이 발생하며 최근에는 추위가 늦도록 머무는 바람에 봄을 느낄 틈도 없이 여름이 다가오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봄꽃들도 동시에 개화를 시작해 짧은 기간 중 만개하다보니 춘계(春季) 향연을 즐기기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맘 때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분홍 진달래나 철쭉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과수원 복사꽃을 연상하게 되는데 이는 소싯적 잠시 읽었던 무협지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상상 속 무릉도원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동진(東晉) 출신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무릉도원의 이야기가 나온다. 옛적 진(晉)나라 무릉(武陵) 땅에 한 어부가 강에서 고기를 잡던 중 길을 잃고 헤매다 홀연히 복숭아꽃이 활짝 핀 숲을 만났다.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잃은 어부는 산 아래 조그만 동굴을 발견하고 배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굴을 빠져나오자 눈앞에 기름진 논밭과 지상낙원이 펼쳐지는데 농부들의 차림은 하늘나라 신선들 같고 남녀노소 모두가 편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세상시름을 잊고 여러 날 지내던 어부는 밖의 세상으로 되돌아오며 사람들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당부 받았으나 어부는 이 사실을 고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 찾아 나섰다.     


무릉도원

어부는 표시해 두었던 길을 찾았으나 끝내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이후로 아무도 길을 묻는 이가 없었고 사람들은 무릉도원을 신선들이 사는 땅으로 여기며 늘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는 이상향(理想鄕)으로 여겼다. 「도화원기」는 서양적 이상향을 보여주는  「유토피아」와 비교해 볼 때 한 가지 확연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서양의 이상향이 “어느 곳에도 없는 실존하기 불가능한 곳”이란 것을 의미함에 비해, 도연명의 「도화원기」는 동양의 이상향이 지금도 중국 어디에 있을 것만 같은 아주 소박한 곳이라는 점이다. 중국 후난성(湖南省)에는 실제[무릉]이나 [도원]과 같은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다.



장자제시(張家界市)에 우링위안(武陵源) 자연풍경구와 창더시(常德市)에 타오위안(桃源) 현(縣)이 있다. 흔히들 세상과 멀리 떨어진 별천지를 비유적으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칭하는데, 중국 남방에서는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자랑하는 지역의 경우 「세외도원(世外桃源)」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설 속 신선(神仙)이 살았다는 무릉도원은 속세를 떠난 별천지를 이르지만, 도원(桃源)은 천하를 품은 영웅호걸들이 큰 뜻을 결의했던 곳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중학시절, 또래의 많은 친구들은 무협지뿐만 아니라 무협영화 [외팔이] 왕우(王羽) 시리즈에 심취 했었다.



1968년 첫 작품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날카로운 검에 오른 팔이 잘려 붉은 피가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선명하게 뿌려지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다. 강호(江湖)의 명가 대사부 딸이 휘두른 칼에 오른팔을 잃은 외팔이는 한 여인을 만나 평범하게 살려했지만 옛 스승과 사문(沙門)을 구하기 위해 다시 검을 든다.


의리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던 가련한 외팔이 검객(劍客) 왕우를 보며 1960년대 관객들이 열광했던 까닭은 아마도 그가 장애인이었기 때문일 듯하다. 왼손검법 책을 전수받아 외팔이 검객이 된 의리의 사나이가 아름다운 여인을 뒤로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는 장면에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게 되면 극장 안은 후끈 달아 랐었다.



외팔이 시리즈에서 왕우 부인 역을 맡았던 차오차오도 무협영화에 출연했었다. 그녀는 복면을 한 채 마을 졸부들의 재산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여걸 흑나비]가 되어 멋진 쌍칼무예를 보이며 당시 숫한 남성 팬들을 매료시키기도 했다. 이후 1970년대 이소룡이 등장하기 전까지 무협영화는 당시 청소년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중학시절 무협영화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왕우가 출연하는 영화가 나오면 빠짐없이 보기위해 책가방에 티셔츠를 넣어두었다가 방과 후 교복을 벗어 티셔츠를 갈아입고 무협영화에 빠져들곤 하였다. 심지어 1973년 고3 여름방학 때도 정무문(精武門)을 보기 위해 종로 피카디리극장에서 긴 줄을 서며 무협영화를 놓치지 않았다.

 


무협지에 빠져있던 내가 삼국지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2년 때였다. 동네형 집에 갔다가 책꽂이에 수북한 낡은 책을 뒤적였던 희미한 기억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팝송에 새로운 호기심이 발동하면서 소설책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며 삼국지 전권을 섭렵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정년퇴직 후 초한지(楚漢志)를 탐독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 고대 중국역사 기원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뒤적이다가 춘추전국시대 이후 진한(秦漢)시기 三國에 필이 꽂히게 됐다. 다행히 돋보기를 걸치지 않고 춘추시대를 함께 했던 공자의 사서(史書)인 춘추를 기점으로 자료를 정리하며 40년이 흐른 뒤 먼지 쌓인 삼국지를 펼쳤다.



이순을 바라보며 다시금 심취해 봤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통해 잠시나마 중원(中原)에 펼쳐진 도원(桃源)의 복사꽃을 연상하며 이 화창한 봄날 흐드러진 벚꽃을 벗 삼아 계절의 진수(眞髓)를 음미해 본다.  - 壬辰(2012)年 사월 열 아흐렛날


Extra shooting


매거진의 이전글 얼리 테이스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