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연재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Jan 02. 2019

간략 삼국지(01)

도원결의(桃園結義)


☐  날뛰는 황건적(黃巾賊)     


기원전 중국의 드넓은 대륙에는 825년을 이어온 周나라의 국운이 기울면서, 천하가 1백여 개의 제후국으로 갈리더니 마침내 전국칠웅[戰國七雄: 진(秦)·초(楚)·연(燕)·제(齊)·조(趙)·위(魏)·한(韓)]간의 세력다툼으로 압축되었다.      


이후 BC 221년 진나라 시황제가 통일을 이뤘으나 진시황제가 50세에 죽게 되자, 곧 초(楚)와 한(漢)으로 나뉘어 다투다 초의 항우가 한의 유방(劉邦; 한고조)에게 병합되었다. 이후 2백여 년이 흘러 왕망의 신(新)나라가 세워졌으나 17년 만에 쇠하며 한고조의 9대손인 유수(劉水; 광무제)가 후한을 세웠다.


하지만 외척의 득세로 점차 힘을 잃어가던 후한의 황실은 궁내관(宮內官)들의 힘을 빌려 정사를 이끌려했다. 결국 11대 환제(桓帝)에 이르러는 십상시(十常侍)에 둘러싸여 세상은 환관들의 세상으로 변해갔다. 환제가 죽고 영제(靈帝)가 즉위했으나, 그 역시 환관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되자 피폐해진 민심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마침내 국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를 틈타 장각이 반정을 꾀해 황건적의 난을 일으키며 각지의 관청을 습격해 관군들을 죽이고 양곡을 강탈해 주린 배를 채웠는데, 그 무리의 수가 50만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경향(京鄕)각지의 영웅들은 난을 평정코자 군사를 이끌게 되었다. 


이때 탁현 땅의 유비는 의병을 모집하는 방문(榜文)을 보다가 장비를 만나 주막에서 교분을 맺던 중 관우와 합석을 하게 됐다. 장비는 예전에 황건적 무리들과의 싸움에서 우연히 관우를 만나 함께 의기를 나누며 서로 알고 지내오던 사이였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탁현 땅 누상촌에서 돗자리를 짜며 빈곤하게 살고 있던 스물여덟의 유비는 前漢때 경제(景帝)의 현손이었다. 탁군에 머물던 유비는 술과 돼지를 잡아 팔던 천하장사 장비와 관부의 쫓김으로 고향을 떠나 몇 년간 강호(江湖)를 떠돌며 산중 무예를 조련해오던 관우와 함께 의병에 응하려던 차였다.


☐  죽음을 각오한 결의형제(結義兄弟)     


몇 순배 술이 돌아가자 세 호걸은 가슴으로 뜻이 통했다. 다음날 세 사람은 탁현 땅 장비 집 뒤의 넓은 도원 한가운데 제단을 차려놓고 형제의 의를 맺었다. 나이로 따지자면 관우가 맏이였으나 그의 제안으로 한나라 종실의 후손으로 인덕(仁德)을 갖춘 유비를 맏형으로 하여 장차 큰 뜻을 이룰 것을 맹세하며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게 되었다.



세 사람이 그날로 의병들을 불러 모으자 몰려든 자들이 무려 5백여 명에 이르다보니 당장 군량과 병기가 필요했다. 때마침 유비는 길 가던 말(馬)장사를 만나게 되어, 자신들의 우국충정을 설명하고 무쇠 1천근과 50필의 말 및 금은 5백 냥의 군비를 헌납 받았다. 이로써 유비군은 병력에 필요한 군장을 갖추며 장비의 교련을 거쳐 병사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갔다. 


이 무렵 유주(幽州)에 5만 여의 황건적이 침범해오자, 유비는 5백 명의 의군을 거느리고 태수 유언을 돕기 위해 유주성으로 달려갔다. 유언은 그들을 환대한 후 유비에게 출진을 명했다. 적장들은 5백 명의 유비군을 가소로이 여겼으나, 한길8자 되는 장비의 장팔사모와 관우의 80근 청룡언월도 앞에서 창칼을 제대로 맞대보지도 못한 채 목이 잘리며 도주했다.


어느 날 청주 성에 황건적이 몰려오자 태수 유언은 병마 5천을 지원해 유비를 선봉에 세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주에서의 싸움과는 달리 적장이 선봉에 나서지 않음으로서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결국 유비는 계교를 써서 산 양쪽줄기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5백의 군사로 적을 유인해 황건적을 물리쳤다.


황건적(黃巾賊)

이때 유비는 스승이었던 중랑장(中郞將) 노식이 광종 땅에서 황건적의 괴수 장각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돼, 남은 군량을 지원받아 5백 의군을 이끌고 스승을 찾아 갔으나 노식은 오히려 관군 1천을 주며 영천을 지원토록 하였다.  영천에는 황보승주전 두 장군이 장각의 아우인 장보, 장량과 맞서고 있었다. 


황보승이 풀밭에 진을 치고 있던 적에게 화공으로 기습해 병사(兵舍)를 불태우자 장보와 장량은 패잔병을 이끌고 허겁지겁 말을 몰아 달아나기 바빴다. 이때 돌연 질풍 같은 한 떼의 인마(人馬)가 달려와 도망치는 도적의 길을 끊었다. 붉은 깃발을 날리며 달려오는 군사들의 맨 앞에 서있는 장수가 있었으니, 그는 작은 체구에 가늘고 길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에 예리한 지모가 번뜩이는 조조였다. 


그는 영제(靈帝) 3년(174년) 20세에 출사해 낭에 부임하여 법령을 엄히 다스리며 낙양일대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조조는 영천싸움에서 퇴각하는 1만의 황건적에 목을 베어 커다란 전공을 세웠다. 유비관우, 장비와 더불어 영천 땅에 나타났을 때는 이미 조조가 잔당들의 소탕을 끝낸 무렵이었기에 유비는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종(廣宗)으로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장각(張角)

☐  ()군의 영걸 손견(孫堅)     


광종을 향해 말머리를 몰아 달려가던 유비는 함거에 갇혀 호송돼가는 중랑장 노식을 만났다. 그는 황건적의 수령인 장각을 조기에 소탕하지 못했다는 모함을 받아 낙양으로 압송된 것이었다. 유비는 망연자실한 채 떠나가는 함거를 한동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광종 땅에는 노식의 후임으로 동탁이 중랑장에 부임하였다. 


유· 관· 장 세 사람이 탁현으로 군사를 돌려 행군을 시작한지 이틀째 되는 날, 한 떼의 관군이 황건적에 쫓겨 패주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장각동탁의 관군을 무너뜨리고 그 기세를 몰아 동탁 군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던 중이었다. 유비의 병사들이 강한 기세로 날쌔게 기습하니 장각의 무리들은 놀라 달아나버렸다. 


뜻밖에 유비 군의 도움을 받게 된 동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비의 관직을 묻더니, 이내 유비의 신분이 하잘것없음을 알아차리고는 경멸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곧바로 군막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탁은 억센 힘을 가진 장사로 성격이 거칠고 난폭했는데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하동태수가 된 이후에 동탁은 오만하고 방자해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동탁(董卓)

서둘러 동탁 진영을 떠난 유비는 주전 장군을 돕기 위해 말머리를 영천으로 돌려 장보가 이끄는 8만 여명의 황건 도당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전세가 불리해진 황건의 적장이 장보 목을 벤 후 항복해 왔다. 한편 장각과 대치하고 있던 황보승 장군이 동탁 군을 이끌고 황건적의 본거지를 공격해 갔을 때 장각은 이미 병들어 죽어있었고, 아우 장량이 관군과 맞서고 있었다. 


선봉에 선 조조는 마침내 장량의 목을 베고 승리를 거두어 제남의 상(相)에 봉해졌다. 주전이 황건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유비와 합세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쯤, 젊은 장수 손견이 군사 1천5백 명을 거느리고 합류해 왔다. 손견은 전국시대 손자의 후손으로 조상들은 오(吳)국 에서 벼슬을 지냈으며 어릴 때부터 용모가 비범하고 기개가 남달랐다. 


주전유비손견과 힘을 합쳐 황건적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많은 무리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주전은 손견과 유비의 공을 조정에 상주해 손견은 별군사마가 됐으나, 조정과 연줄이 닿아있지 않던 유비는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미관말직인 현위로 부임하게 되었다.  


손견(孫堅)

☐  풍운에 휩싸인 황실(皇室)     


유비가 부임한지 넉 달이 되자 조정에서는 황건의 난 때 거짓 군공(軍功)으로 관직을 받은 자들을 색출코자 각 고을에 황제의 칙서를 내렸다. 때마침 유비에게도 천자의 칙사가 내려와 위세를 부리며 뇌물을 받기 위해 까닭 없이 생트집을 잡았다.  


몇 날이 지나도 뇌물상납이 없자 칙사는 유비를 모해하고자 현리들을 불러들여 다그치고 있었는데, 이때 장비가 나서 탐관오리인 칙사를 두들겨 패면서 결국 유비는 결국 벼슬을 버리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관군에 쫓기게 된 유비 3형제는 대주태수 유희에게 의탁하였다.


황건의 난이 평정되자 조정은 다시 십상시(十常侍)들이 무능한 영제(靈帝)를 싸고돌면서 또다시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내관들이 뇌물을 바치지 않는 자들의 관직을 박탈하는 등에 문란과 부패가 이어지자 세상 밖에서는 반란의 무리들이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십상시들은 손견 유우 하여금 반란 무리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손견이 반군을 평정하는 동안 유우유희가 천거한 유비를 선봉에 세워 반군들을 평정하였다. 이로써 유비는 칙사를 구타한 죄를 사면 받고 지난날 스승 노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던 공손찬의 천거로 평원 현령에 중용되었다.  


한편 황실에서는 영제가 병에 시달리자 차기 황제자리를 놓고 분란이 일어났다. 황후인 하후(何后)에게는 적장자인 (辯)이 있었고 오라비인 하진이 대장군으로 있었다. 이에 십상시들은 변(辯)이 제위를 잇게 되면 하진이 더욱 득세할 것을 우려해 서자인 황자 (協)을 지원하고 있었다. 


하진(何進)

영제가 위독해지며 십상시들은 서둘러 하진을 주살하려다 발각되었다. 황제가 사망하자 하진조조의 제안에 따라 변을 천자로 옹립하기 위해 원소 내세워 새 황제(少帝)의 즉위를 천하에 선포했다. 원소는 4대에 걸쳐 3명의 재상을 배출한 명문출신으로 사례교위를 지내고 있었다. 


이때 원소는 환관들을 모두 제거하고자 진언했지만 황후의 만류로 하진은 십상시를 모두 제거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환관들은 황후의 보호를 받아가면서 계속해 하진을 음해하자, 하진은 누이인 황후로 인해 환관들을 직접 제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원소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방의 장수들로 하여금 낙양에 입성해 환관들을 몰살토록 격문을 보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초야에 묻혀있던 영걸들이 세상 밖으로 출몰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 이미지 출처: 코에이(Koei) 삼국지 (위 이미지는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편 다시보기  https://brunch.co.kr/@jangkm2000#magazines
매거진의 이전글 간략 삼국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