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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Jan 07. 2019

간략 삼국지(03)

군웅할거(群雄割據)


☐  호뢰관의 3()   

  

관우화웅의 목을 취하자, 이숙의 보고를 받은 동탁은 여포와 이유를 불러 대책을 상의했다. 이유의 계책에 따라 통탁원소의 숙부인 원외를 죽인 후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낙양에서 50리 떨어진 호뢰관에 주둔하며 여포에게 관 앞을 지키게 했다. 


원소의 진(陣)도 제후들이 모여 조조의 계교에 따라 공손찬 등 8로 제후들은 호뢰관을 진격토록하고, 나머지 제후들은 사수관을 공격케 하면서 조조 자신은 형세에 따라 양군을 적절히 돕기로 했다. 하내태수 왕광이 제일먼저 호뢰관에 당도하자 여포가 나는 듯이 말을 달려왔다. 방천화극을 치켜들고 위풍당당하게 적토마 위에 높이 앉아있는 여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케 했다. 


동탁 장수 여포(呂布)

8로 제후들의 장수들이 여포에게 추풍 낙엽처럼 목이 떨어지고 많은 군사들마저 짓밟히자, 8로의 태수들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에 바빴다. 여포는 질풍같이 돌진해 여러 제후들의 진지를 짓뭉개며 공손찬의 진영에 이르러 호통을 쳤다. 분을 이기지 못한 공손찬은 창을 들고 나아가 여포와 겨뤘으나 결국 여포를 당해내지 못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이때 장팔사모를 치켜든 장비가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 수염을 곧추세운 채 여포의 방천화극을 가로막으며 불꽃 튀는 싸움을 했다. 싸움은 50여 합을 넘기며 장비의 말이 점점 뒤뚱거리게 되자, 이를 본 관우가 80근의 청룡언월도를 서릿발처럼 휘두르며 내달아 여포를 협공했다. 이에 유비도 쌍고검을 휘두르며 를 향해 달려 나갔다. 


유비(劉備)

세 사람을 상대로 한 치열한 대결 끝에 적토마가 지친 듯 뒷걸음을 치자, 마침내 여포는 호뢰관 쪽으로 달아났다. 미쳐 관내로 들어가 못한 여포 군사들은 제후 군들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후일 세상은 이 싸움을 “호뢰관의 三戰”이라 불렀다. 


모처럼의 승전보를 접한 원소는 손견에게 다시 사수관을 공격토록 격문을 보냈다. 이에 손견은 원술을 찾아가 지난 사수관 싸움에서 군량과 마초를 보내지 않은 까닭을 따졌다. 두려움을 느낀 원술은 자신의 부하에게 뒤집어 씌우고 그 자리에서 부하의 목을 벤 후에 사과하였다. 


한편 동탁은 잇단 패전으로 군 사기가 저하되자, 이유의 제안으로 도읍을 [장안]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동탁이 [낙양]을 떠나며 종묘와 궁궐에 불을 지르니 200년 한나라의 도읍지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호뢰관 전투

☐  옥새(玉璽)를 얻은 손견  

   

맨 먼저 낙양에 들어선 손견은 궁궐에 위병을 세워 궁을 정비하였다. 한편 조조는 낙양에 당도하자마자 원소를 찾아가 동탁을 추격해 천하를 안정시키자고 권했으나 원소를 비롯한 여러 제후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울화가 치민 조조하후돈을 비롯한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동탁의 뒤를 쫓았다. 


동탁형양 땅(형주경계)에 이르자 태수 서영이 영접을 나왔다. 동탁서영을 불러 형양성 밖에 서영의 군사를 매복케 하고 여포로 하여금 조조 군에 맞서게 했다. 하후돈여포가 맞서 싸우기 수합이 되기도 전에 중과부적이던 조조는 퇴각 령을 내려 형양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하지만 조조 군이 산기슭에 겨우 도착하자 매복해있던 서영의 군사가 덮쳐 왔다.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천하의 맹주들을 불러 모으며 매번 계교를 내어 실질적으로 제후들을 지휘했던 조조였지만 그는 단신필마로 서영의 화살을 맞아 도주 중 아우 조홍을 만나 가까스로 사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조조 장수 하후돈(夏侯惇) / 형양태수 서영(徐榮)

조조는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남은 병력은 5백여 명에 불과했다. 동탁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결단의 내리지 못한 제후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가득했던 조조는 낙양 대신 하내(河內)를 택해 말머리를 돌리며 후일을 도모키로 하였다.    


한편 낙양에 머물던 제후들이 시가를 정돈하는 동안 손견은 폐허된 궁궐을 복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궁의 한 우물에서 오색 빛이 뻗쳐오른다는 제보에 따라 우물을 뒤지던 중 한 여인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여인의 주머니 속에 시황제(始皇帝)이후로 내려온 전국(傳國)의 옥새가 숨겨 있었다. 



손견은 수하 장수 정보의 제의에 따라 강동으로 돌아가 대사를 도모키로 했다. 그러나 손견의 부하 한사람이 원소에게 달려가 옥새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 주었다. 날이 밝아 손견이 원소에게 작별인사를 고하자 원소는 옥새를 조정에 돌려줄 것을 강요했다. 


손견이 끝내 시치미를 떼자 분위기가 험악해지며 서로 칼을 빼들었다. 여러 제후들이 두 사람을 제지하며 말리자, 손견은 마지 못하는 척하며 자리를 재빨리 빠져나와 군사를 거두어 강동으로 떠났다. 이에 원소형주지사 유표에게 밀서를 보내 옥새를 빼앗도록 하고, 이를 의논키 위해 하내에 있는 조조낙양으로 청했다. 


강동 호랑이 손견(孫堅)

낙양에 당도한 조조에게 여러 제후들이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는 던 중 조조는 분연히 입을 열어 여러 제후들이 대의를 저버렸음을 지탄한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남은 군사를 수습해 양주(강동)를 향해 떠나갔다. 한편 손견은 그를 기다리던 유표 군이 공격을 가해오자 군사 태반을 잃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강동으로 달아났다. 


이로써 남은 제후들의 의맹(義盟)은 날로 맥없이 무너지며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기에 이르렀다. 조조와 손견이 떠난 어느 날, 공손찬과 유비 등도 무능한 원소 곁을 떠나 북평(北平)과 평원(平原)땅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본 페이지에 나오는 지명(地名) 위치

☐  상산(常山)의 조자룡  

        

대군을 거느리며 낙양에 머물던 원소 또한 양초가 부족해 군사를 보존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하내(河內)로 이동했다. 그때 기주목사 한복원소에게 군량미를 보내왔다. 하지만 원소의 모사(謀士) 봉기북평 공손찬에게 제의해 기름진 땅 기주를 쳐 반씩 나눠 갖자고 권해 군사를 일으키도록 한 후 한복에게 은밀히 공손찬 거병을 알려 한복이 구원을 요청할 때 [기주]를 빼앗아 버리자고 간하였다. 


명문가 출신 원소(袁紹)

전부터 기주를 탐내고 있던 공손찬은 맹주인 원소가 먼저 나서 기주를 치자고하니 명분이 생긴 셈인지라 즉시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했다. 공손찬의 침공을 알게 된 한복원소의 계책대로 구원병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기주성에 입성한 원소한복을 분위장군에 명하고 스스로 기주목이 되었다. 


뒤늦게 한복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기주를 도망쳐 진류태수 장막에게 몸을 의탁했다. 한편, 원소와의 밀약을 믿고 진군을 하던 공손찬기주가 이미 원소의 손아귀에 들어갔음을 알게 되자 아우 공손월원소에게 보냈다. 하지만 공손월은 돌아오는 도중 온몸에 화살이 꽂혀 고슴도치의 모습으로 죽고 말았다.  


기주목사 한복(韓馥) / 진류태수 장막(張邈)

공손찬은 이를 갈며 기주성으로 달려갔다. 공손찬이 말을 몰아 큰소리로 원소를 꾸짖자 원소의 수하 문추가 달려 나가 공손찬과 겨뤘다. 공손찬은 20여 합을 부딪쳤으나 이내 진지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며, 얼마간의 싸움이 있었으나 이미 싸움은 원소군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적장 문추에 쫓겨 투구마저 벗겨진 채 정신없이 달아나던 공손찬은 말에서 고꾸라져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아슬아슬한 순간 문추의 앞을 가로 막으며 장창을 겨눈 장수가 나타났다. 짙은 눈썹 아래 서글서글한 눈매의 젊은 장수는 맹장 문추와 맞붙어 50여 합을 부딪치며 불꽃을 뿜었다. 이때 공손찬의 장병이 몰려오자 문추는 자기 진영으로 꽁무니를 뺐다. 


원소 장수 문추(文醜)

정신을 가다듬은 공손찬이 젊은 장수에게 인사를 청하자 예를 다해 답하는 장수는 조자룡이었다. 그는 본래 원소의 휘하에 있었으나 원소가 충군구민(忠君救民)의 마음이 없음을 알고 그를 떠나 공손찬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다음 날 공손찬 백마진을 좌우로 편성해 전투를 벌였다. 원소는 공손찬의 백마 철기군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공손찬이 먼저 공격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공에 나선 공손찬의 군사들은 8백 여의 궁사들에게 벌집이 되어 죽거나 상했다. 사기가 오른 원소군이 거센 맹공을 퍼붓자 공손찬은 또 한 번의 참담한 패배를 맞았다. 하지만 5백의 군사를 거느린 후진의 객장 조자룡은 아수라장 속에 원소의 장수를 베고 적군을 풀잎처럼 쓰러뜨렸다. 


북평태수 공손찬(公孫瓚)

원소가 칼을 빼들고 죽기를 작정으로 싸우다보니 조자룡의 군사수가 너무 적어 밀리면서 반나절 동안 혼전이 거듭되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본진에 원소를 선두로 한 군사가 들어 닥치자 공손찬은 급히 말을 재우쳐 달아났다. 원소가 공손찬을 추격하여 5리쯤 뒤쫓을 때 유비 세 형제가 원소를 향해 덮쳐들었다. 


유비공손찬의 소식을 듣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오던 중이었다. 원소는 혼비백산이 되어 달아나다 뒤쫓던 공손찬의 군사에게 대패했다. 진영으로 돌아온 공손찬유비에게 조자룡을 불러 소개하였다. 유현덕의 온화한 눈빛과 조자룡의 부드러우면서도 냉철한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그날 이후 싸움에서 패한 원소기주 성문을 굳게 닫아걸자 양군은 서로 맞선 채 달포 가량을 대치하게 되었다.    

  

조운(趙子龍)

☐  군웅할거(群雄割據

                   

원소공손찬과 싸워 패했다는 소식이 장안동탁에게 전해질 무렵 모사 이유는 동탁에게 원소 공손찬의 화해를 주선토록 간했다. 두 사람이 싸움을 물릴 수 있는 명문을 만들어 주어 자연스레 동탁을 따르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로써 화해의 모양새를 갖춰 각기 승산 없는 싸움을 접게 되었다. 공손찬동탁에게 감사의 표문(表文)을 올리고 유비를 평원태수로 봉할 것을 상주했다.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공손찬을 굴복시킨 동탁은 기뻐하며 공손찬의 청을 윤허했다. 이로써 공손찬유비의 공훈에 보답하게 됐다. 


밤이 되자 조자룡은 유비의 막사를 찾아 동탁을 받아들인 공손찬에 대한 실망을 털어놓자, 유비조자룡을 달래 위로했다. 다음날 유비평원의 태수가 되어 길을 떠났다. 한편, 원술은 형 원소가 기름진 옥토 [기주]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에게 포상이 주어지지 않음에 불만을 품었다. 


동탁 모사 이유(李儒)

원술은 보상심리로 형에게 말을 지원해 달라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반목하게 됐다. 편협한 원술형주태수 유표에게 양곡을 빌려 달라 요청했다 거절당하자, 손견에게 밀서를 보내 “지난날 유표손견을 공격한 것은 원소가 시킨 일인데, 원소유표와 함께 또 다시 손견을 공격하기로 약조했다”며 부추겼다.     


분개한 손견이 장남 손책과 함께 휘하 장수를 거느리고 군선(軍船)에 올라 진군하자, 유표의 모사 괴량이 계책을 세워 강변에 궁사를 매복시켰다. 이에 손견은 군사들에게 뱃전에 엎드려 몸을 숨긴 채 배를 기슭에 대지 말도록 했다. 손견의 명에 따라 군사들은 함성만 지르며 사흘 밤낮동안 강위를 오르내리기만 했다. 


형주태수 유표(劉表)

유표의 궁사들이 무턱대고 쏘아댄 화살이 수없이 강물에 떨어지고 뱃전에 꽂히다 보니 어느덧 화살이 바닥나게 되었다. 이때 주워 모은 10만여 개의 화살을 챙긴 손견의 군사는 육지의 적을 향해 쉴 새 없이 활을 쏘며 공격했다. 쫓기는 적을 향해 손견은 친히 군을 이끌며 숨 돌릴 틈 없이 진군해 나갔다. 유표의 장수 황조는 군사를 수습해 성 밖 들판에 진을 쳤다. 


양군의 장수가 나와 창과 칼을 부딪치며 30여 합의 불꽃을 튀길 때 쯤 손책이 시위에 화살을 메겨 만월(滿月)같이 당긴 후 유표의 장수를 말에서 떨어뜨리니, 기세가 꺾인 유표의 군사들은 도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형주의 양양성은 뒤로는 산을 업고 앞에는 강이 흘러 공격이 까다롭다보니 손견은 성을 에워싼 채 대책 없이 마냥 시일만 끌고 있었다.



▶ 이미지 출처: 코에이(Koei) 삼국지  (위 이미지는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편 다시보기  https://brunch.co.kr/@jangkm2000#magaz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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