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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Feb 06. 2019

간략 삼국지(16)

삼고초려(三顧草廬)


☐  조인의 팔문금쇄진법(八門金鎖陳法)                     


여광 형제의 비보를 전해들은 조인은 2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번성(양양 인근)을 나서, 하수(長江 줄기)에 배를 띄우고 [신야]로 나아갔다. 조인군의 선봉 이전과 유비군의 선봉 조운이 서로 말을 달려 맞붙었다. 


싸운 지 10여 합이 못되어 달아난 이전조인에게 [번성]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으나, 조인은 다음날 새로운 진형을 펼치며 직접 선두를 지휘했다. 이때 선복은 진법에 밝지 못한 유비에게 적진의 형태가 "팔문금쇄진"임을 알리며, 8문의 진세로 보아 중군(中軍)에 중심이 빠져있어 그 허를 찌를 것을 아뢨다. 



유비는 선복의 해박함에 감탄하며 조운을 불러 동남각 생문으로 쳐들어가, 서쪽의 적을 짓밟으며 달리다가 다시 동남방으로 돌아오라 명하였다. 조운이 장창을 추켜들고 말에 올라 5백 군사를 이끌고 생문으로 짓쳐 들어가자 팔문금쇄진은 이내 대혼란이 일었다. 


조운(趙子龍)

유비군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인군을 덮치자 조인은 크게 당황하며 군사를 물렸다. 그날 밤 이경이 되자 조인은 야습을 감행했으나, 선복은 이에 대비한 군사를 매복해 화공지계(火攻之計)를 펼치며 쉴틈 없이 적군을 엄습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보존한 조인과 이전은 [번성]에 이르렀으나, 성은 이미 관우에게 점령돼 있었다. 조인을 뒤따르던 군사는 관우군에게 쫓겨 거의 시체가 되었고, 조인은 처참한 몰골이 되어 가까스로 [허창]에 당도했다. 


조인(曹仁) / 이전(李典)

[번성]으로 들어간 유비는 현령인 유필의 환영연을 받으며 유필의 생질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 유봉이라 부르게 하고, 조운에게 1천의 군사를 주며 [번성]을 지키게 한 후 [신야]로 돌아왔다. 


그 무렵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조인과 이전을 대한 조조는 싸움에서의 패배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임을 들어 질책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인이 용병과 용맹에 능한 맹장임에도 크게 패하고 돌아온 까닭이 궁금했던 조조는 유비에게 선복이란 군사(軍師)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이때 정욱이 나서 선복이 자신의 죽마고우이라 조조에게 설명했다. 선복의 이름은 원래 서서인데 젊은 날 살인을 하고 달아나 이름을 바꾼 후 학문에 정진하여 학식과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유봉(劉封) / 정욱(程昱)

조조서서가 효자라는 말을 듣고 그의 홀어머니를 [허도]로 불러들여 아들에게 서찰을 쓰도록 했다. 하지만 서서의 모친은 조조를 꾸짖으며 벼루와 붓을 팽개치자, 정욱이 계책을 내놓으며 격분해하는 조조를 달랬다. 


정욱은 그날부터 서서 모친을 별당에 머물게 하고는 거짓서한을 써 서서에게 보냈다. [신야]의 서서는 서한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날 유비에게로 가, 조조의 간계에 빠져 감금당해 있는 어미를 구하기 위해 [허도]로 떠날 것을 아뢨다.


서서(徐庶)

☐  와룡의 언덕와룡강(臥龍岡) 

       

유비는 섭섭함과 안타까움으로 말문이 막혔으나 효를 행하려는 서서를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 서서는 비록 조조를 섬기게 되더라도 평생 그를 위해 어떤 책모도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작별을 고했다. 못내 이별을 아쉬워하던 유비 앞에 갑자기 서서가 말을 돌려오더니, [양양성]에서 20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한 현인의 내력을 전해주었다.


그의 이름은 제갈량이며 자(字)는 공명으로 마을근처에 [와룡]이란 큰 언덕이 있어 “와룡 선생”이라 불려 지는데, 그는 학식과 재주가 빼어난 선비로써 만약 그를 얻게 된다면 한나라의 장자방(張良)을 얻는 것과 같은 이치니 한시바삐 그를 찾아가 보도록 당부했다. 


유비서서로부터 지난날 수경선생 사마휘가 얘기하던 복룡이 바로 제갈공명임을 알게 되자, 뛸 듯이 기뻐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서서유비에게 마지막 배려를 하고 후련한 듯 채찍을 휘둘러 [허도]로 향해 달렸다. [허도]를 향해 달리던 서서는 문득 제갈공명을 떠올리며 잠시 와용강에 들러, 유비의 간청에 응해줄 것을 부탁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

하지만 공명은 언성을 높이며 불쾌한 듯 나가 버렸다. 서서는 하는 수 없이 후일을 기약하며 여러 날을 달려 [허창]에 이르렀다. 서서조조에게 예를 올린 후 별당으로 가 흐느끼며 문안을 올렸으나, 모친은 유비를 버리고 떠나온 서서를 꾸짖으며 홀연 병풍 뒤로 들어가 목을 매어 자결했다. 


서서는 모친의 유해을 안고 혼절해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조조서서 모친의 영전에 몸소 나와 제물을 올리고 비통해 하는 서서를 위로한 후 이듬해 남쪽으로 군사를 낼 계획을 세우고, 장하(長下)의 물을 끌어들여 큰 호수를 만들어 수군을 조련시키며 봄이 되길 기다렸다. 


한편 [융중]의 산기슭에 머물고 있는 제갈공명은 일찍이 조실부모한 후 숙부에게 의탁해 있다가 열일곱 나이에 대학자 석도의 밑에서 수학하였다. 동문 중에 서서맹건공명보다 나이가 위였으나, 공명의 학문은 날이 갈수록 군계일학(群鷄一鶴)을 이루었다. 


맹건(孟建)

☐  삼고초려(三顧草廬)와 제갈공명  


공명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학당을 떠나 초려(草廬)에 머물며 한가한 나날 속에 뒷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명은 하남의 명사인 황승언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녀의 타고난 용모는 박색이었지만 부부의 금술만은 좋았다. 


유비 공명의 초당을 처음 방문한 시기는 공명나이 스물일곱이던 건안(建安) 12년(207) 가을이었다. 이때 유비관우 장비를 거느리고 [남양]으로 향하며, 연못 속에 깊이 숨어 있는 용을 자신 곁으로 일으켜 세우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와룡강 초가의 사립문에 도착하자, 한 아이가 나와 와룡이 출타중임을 알렸다. 하는 수 없이 언덕을 내려오던 유비는 공명의 친구인 최주평을 만나 잠시 천하에 대한 의견을 나눈 뒤 말에 올라 [신야]로 돌아왔다. 

 

12월이 되자, 유비는 한겨울 살을 에는 듯한 삭풍을 맞으며 다시 공명을 찾아 나섰다. 몰아치는 눈보라에 장비는 얼굴을 찌푸리며 시골선비 하나를 얻기 위해 이렇게 고생해야하는지 투덜거리며 유비의 뒤를 따랐다. 



공명의 초려에 이르자 유비는 초당으로 들어가 시를 읊고 있는 젊은이와 인사를 나눴는데, 그는 공명의 동생인 제갈균이었다. 제갈균은 친구인 최주평이 공명을 먼저 찾아와 출타했으며, 한번 나가면 언제 귀가할지 알 수 없다 전했다. 


유비는 두 번이나 찾아와도 만나볼 수 없는 공명의 박복한 연분에 탄식하고 말았다. 유비는 문방사우를 청해 공명에게 글을 남긴 뒤 아쉬움에 와룡강을 뒤돌아보며 [신야]로 다시 돌아왔다. 


제갈균(諸葛均) / 최주평(崔州平)

해가 바뀌어 건안 13년(208) 봄이 되면서 유비가 다시 공명을 찾기 위해 길일(吉日)을 택하자, 관우는 유비에게 불만을 토해냈다. 고을 성주가 두 번씩 찾았음에도 아무런 답례가 없는 시골선비에게 심사가 뒤틀려 있던 장비도 공명에게 밧줄을 씌워 데려오겠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유비가 언성을 높여 꾸짖으며 말위에 오르자 관우는 아무 말 없이, 장비는 투덜거리며 유비를 따라 나섰다. 이른 봄이라 바람이 쌀쌀했으나, 지난겨울보다 가는 길이 한결 수월했다. 이윽고 와룡강에 이르러 사립문을 들어서니 아이가 달려 나와 와룡선생이 초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고 전했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유비는 문안으로 들어가 그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며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투덜대던 장비가 울타리 틈으로 초당을 들여다보더니 얼굴이 시뻘게지며 불을 지르겠다고 날뛰자, 관우가 제지하고 나섰다. 


몇 식경이 지나 의관을 갖춰 입은 공명은 유비가 무릎을 꿇어 절을 하자, 그의 정중하고 겸손함에 내심 감복했다. 자신을 도와달라는 유비의 간곡한 청에 공명은 재주가 모자란다며 사양했으나, 결국 유비의 열의에 마음을 열고「天下三分의 計」를 역설했다. 



북에 웅거한 조조는 천시(天時)를 얻은 것이고 남의 손권은 지리(地利)를 취했으니, 유비는 [형주]와 [익주]의 서쪽 54주를 취해 인화(人和)로써 나라를 일으켜 천하삼분의 대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 공명의 주장이었다. 


유비가 종친의 땅을 빼앗는 것이  정당치 않음을 제기하자, [형주]의 유표는 머지않아 수명을 다할 것이고, [익주]의 유장은 국정을 어지럽히고 백성이 괴롭히니, 두 곳을 취해도 인의(仁義)에 어긋남이 없다며 공명은 명쾌하게 말했다. 


유장(劉璋)

유비는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군사가 되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해 마침내 승낙을 얻어냈다. 공명은 유사시에 [형주] 유민들을 병사로 쓸 수 있도록 그들을 호적부에 올릴 것을 유표에게 권하도록 하고, [남양]의 부호들에게 돈을 빌려 군자금으로 쓰게 했다. 


유비는 제갈공명에 대한 관우와 장비의 불만을 해소시키며,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은 지 20년 세월 만에 천하삼분의 계책을 실현하기 위해 천하를 관망하고 있었다.




▶ 이미지 출처: 코에이(Koei) 삼국지 (위 이미지는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편 다시보기  https://brunch.co.kr/@jangkm2000#magaz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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