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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Feb 08. 2019

간략 삼국지(17)

공명의 지략


☐  장강(長江)을 넘나든 손권

       

손권은 부친과 형의 뒤를 이어 [강동]의 기업(基業)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때 손권조조보다 스물여덟 아래였으며, 유비보다 스물두 살 어린나이였다. 손권은 숨은 인재들을 영입하며 날로  위세를 높여갔지만, 조조와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조조손권의 아들을 [허도]로 보내 조정에서 천자를 모시라고 사자를 보내오자, 주유가 나서 반대하였다. 주유손권의 형인 손책과 친구이자 동서지간이었다. 조조손권이 자신의 뜻을 거역하자 [강동]을 정벌코자 작정했지만, 북방에 원소의 세력들이 남아있어 쉽사리 남으로 군사를 낼 수 없었다. 


손권(孫權) / 주유(周瑜)

한편 손권은 주유를 대도독으로 중용하고 3, 4년에 걸쳐 [장강]에 있는 병선 7천여 척을 조련하며 뒷날을 대비했다. 손권의 모친이 사망한 이듬해인 건안 13년, 유표의 장수 황조 휘하에 있던 부장 감녕이 투항해왔다. 


손권이 감녕을 불러 황조를 무찌를 계교를 묻자, 조조가 머지않아 남쪽 [형주]일대를 차지하려할 터이니, 먼저 (吳)와 인접해 있는 [강하]태수 황조를 먼저 무찌른 후에 유표가 있는 [형주]를 도모할 것을 아뢨다. 


이에 손권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장강(楊子江)을 거슬러 [강하]로 밀고 들어갔다. 동오군의 정병들은 황조군의 배위에 기어올라 불을 지르며 적군을 닥치는 대로 베면서 함대를 무너뜨리고, 황조가 있는 [강하성]에 맹공격을 퍼부었다. 



황급히 [형주]로 달아나던 황조의 머리가 감녕에게 잘려나가자, 손권은 비로소 부친을 죽인 원수 황조를 징벌하게 되었다. [강하성]이 마침내 손권의 손에 떨어졌지만, 그는 성을 비워둔 채 [강동]으로 돌아가 유표에 대비코자 수군(水軍) 양성과 조련에 힘을 기울였다. 


그 무렵 조조가 [강남]을 치기위해 [기주]에 "현무지"라는 못을 만들어 수군을 조련하고 있음을 간파한 공명은 유비에게 [강동]에 세작을 보내 동정을 살피도록 했다. 손권이 수군을 활발히 양성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을 때쯤 유비는 [형주]로 와달라는 유표의 전갈을 받고 공명과 함께 [형주]로 향했다. 


황조(黃祖) / 감녕(甘寧)

유비가 지난날 잔치도중 채모로 인해 몸을 빼낸 일을 사죄하자, 오히려 유표는 [형주]의 앞날을 걱정하며 유비에게 [형주]를 부탁했다. 유표의 청을 사양하고 자리를 물러나는 유비의 태도를 공명은 마뜩치 않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덕망에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때마침 유표의 장남 유기가 울먹이며 찾아와 계모 채씨와 채모로 부터 자신을 구해줄 것을 청하자, 유비 유기를 달래며 공명을 찾아가 계책을 구하라 일렀다. 공명유기가 부친인 유표에게 청할 계책을 일러 주었다.  


마침내 유기황조가 죽은 후 비워있던 [강하성]의 수비를 맡기로 허락을 받은 후 군사 3천을 이끌어 [강하]로 떠나고, 유비도 [신야]로 돌아왔다.   


유기(劉琦)

☐  공명의 첫 용병(用兵)   

                           

이 무렵, 조조는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해 진용을 갖추고 내정을 다진 후 무장들을 불러 모아 남방의 형세를 의논했다. 조조유비유표와 힘을 합치기 전에 먼저 유비를 치기로 하고, 하후돈을 총군의 도독으로 삼아 10만의 군단을 이끌게 했다. 


이때 순욱공명의 범상치 않음을 걱정하자, 조조하후돈에게 의기를 북돋아주며 출진을 명했다. 하후돈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 먼저 [신야]를 엿보기 위해 [박망성]에 진영을 펼쳤다. 


한편 [신야성]의 유비는 백성 중 장정 3천명을 뽑아 공명으로 하여금 고도의 전술을 가르치도록 하여 손색없는 정예병을 만들고 있었는데, 하후돈이 10만의 대군을 몰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유비는 공명에게 군사(軍師)로서의 권한을 위임했다. 


하후돈(夏侯惇)

공명이 군령을 내려 군사를 각기 나눠 배치하자, 공명의 재주를 의심하던  관우와 장비는 군령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유비 또한 공명과 첫 싸움을 치르는 터라 한 가닥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한편 적의 진용을 살피기 위해 언덕에 오른 하후돈은 빈약한 유비군의 포진을 보며 빈정거리더니, 이내 공격명령을 내린 후 말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이에 유비군의 선봉인 조운하후돈을 맞아 10여 합을 겨루다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후돈이 달아나는 조자룡을 덮치자 조운도 창으로 응수하는 척하며 계속 달아났다. 어느덧 하후돈이 [박망파]에 이르자 유비가 거느린 군사 수백 명이 나타나 분전하더니, 돌연 조운과 함께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하후돈(夏侯惇) / 조자룡(趙子龍)

하후돈이 워낙 급히 유비를 뒤쫓다보니, 후진에 있던 우금과 이전과의 거리가 10리 나 떨어지게 됐다. 우금은 급히 말을 몰아 가까스로 하후돈을 뒤쫓아 만난 후 화공(火攻)의 위험성을 알렸다. 싸움터에 이골이 나있던 하후돈 이었지만 불현듯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말머리를 돌리려하자, 홀연 뒤편에서 불길이 타오르며 큰 함성이 일었다. 


놀란 하후돈이 퇴각을 명하자, 사방에서 일제히 불길이 치솟으며 삽시간에 갈대밭으로 번졌다. 하후돈의 군사대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 말과 사람이 뒤엉키며 뒹굴었다. 하후돈은 퇴각을 외치며 말을 버리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이전(李典) / 우금(于禁) / 하후란(夏侯蘭)

후진에 있던 이전이 군사를 돌리려하자, 불쑥 관우가 거느린 군사가 나타나 군량과 마초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전은 겨우 목숨을 보전할 길을 찾아 달아나고, 우금도 살길을 찾아 달아났다. 하후돈의 부장 하후란도 장비에게 목이 떨어져 나가자, 혼이 빠진 적군들은 달아나기 바빴다. 


새벽녘에 싸움이 끝나자 3만이 넘는 적의 시체가 들판을 메웠고 산천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유비와 공명이 군사를 거느린 채 [신야]로 개선하자, 조조는 남정(南征)을 결심하고 50만 대군을 5개 대로 나누어 출정을 준비했다.      



☐  제갈공명의 화공(火攻)과 수공(水攻지략     


조조순욱에게 [허도]를 지키게 한 후 [강남]으로 군사를 낼쯤, [형주]의 유표는 병상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유표유비를 불러 또 다시 [형주]를 부탁했으나 끝내 유비가 청을 물리치자, 맏아들 유기에게 [형주]를 맡긴다는 유언장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유표의 후처 채부인은 자신의 친자인 유종을 후사로 삼기위해 오라비인 채모와 모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들은 거짓 유언장을 만들어 차남 유종을 [형주]의 주인으로 내세우고 일족과 함께 [형주]와 [양양]에 자리를 나눈 후, 유비와 유기에게는 장례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유종(劉琮)

이때 남하하던 조조가 [완성]에 이르렀다는 급보를 전해 받은 유종은 채모를 비롯한 대신들의 설득으로 항복의 글을 써서 조조의 진중에 바치도록 했다. 조조에게 항복하는 글을 올린 [형주]의 사자가 돌아가는 길에 때마침 장비에게 잡혀 유비는 그간에 [형주]의 사정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이에 공명은 서둘러 채부인 일족을 처치하고 [형주]를 차지한 후 조조의 남정(南征)에 맞서기를 권했지만, 유비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공명 [신야]의 백성들을 데리고 [번성]으로 피난길에 나서도록한 뒤, 장수들을 불러 모아 각자의 임무를 내리고는 유비와 함께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 자리를 펴고 앉았다. 


채부인(蔡夫人)

한편 완성(양군)에 군사를 주둔시킨 조조허저의 정병 3천과 제1군 10만 군사를 [신야]로 진격하게 했다. 허저가 군사를 이끌며 작미파에 이르는 동안 유비군이 보이질 않자 불안해하고 있는데, 홀연 산위에서 풍악소리가 들려와 산위를 올려다보니 유비공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를 본 허저는 화가 치밀어 군사를 이끌고 산위로 말을 달렸다. 이때 산위에서 바위와 통나무가 쏟아져 내려오며 수십의 인마가 크게 상했다. 허저가 황급히 군사를 물리려하자, 앞 산봉우리와 산 뒤에서 함성과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인은 당황하는 허저를 일깨운 후, 유비군이 모두 산에 매복해 있어 [신야성]이 비어있을 것이라 여기며 [신야]로 진격해 들어갔다. [신야성]의 네 개 성문이 모두 열려 있는데 사람의 기척이 보이질 않자, 조인은 적군이 모두 피난 간 것으로 확신하고 지쳐있던 군사들을 성에서 하루를 묵도록 하였다.


제갈공명(諸葛孔明)

조인조홍이 관아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있을 쯤 배를 채운 군사들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초경쯤이 되자 바람이 세차게 일더니 서, 남, 북문에서 불길이 일며 거센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성곽까지 번졌다. 군사들은 독안에 든 쥐가 되어 우왕좌왕하며 동문으로 밀어닥쳤다. 


서로 밟고 밟히며 불에 타 죽는 시체가 성문 앞을 가로막을 지경이었다. 조인과 장수들이 겨우 동문을 빠져나오자, 조자룡이 뒤를 쫓아 닥치는 대로 베고 찔렀다. 좌우에서도 미방유봉의 군사들이 쏟아져 나와 뒤따르는 장졸들을 덮쳤다.

 

   

어느덧 사경(四更)이 되자, 조인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백야]에 이르러 강물에 목을 축이고 있었다. 한편 상류에 매복하며 [산야성]에서 불길이 이는 것을 보고 있던 관우는 하류 쪽에서 사람소리가 들리자, 공명이 지시한 대로 앞서 강물을 막아두었던 모래자루를 일제히 무너뜨렸다. 


강물이 홍수 때의 탁류처럼 하류를 향해 넘쳐흘러 조인의 군사를 순식간에 덮치자, 물에 휩쓸려 죽고 떠내려가는 시체가 강줄기를 메웠다. 조인이 뒤따르는 장수들과 함께 겨우 목숨을 보전한 채 박룡 기슭에 이르자 이번에는 장비가 나타났다. 


때마침 허저가 달려와 장비와 맞붙어 싸우는 동안 조인조홍은 칼 한번 빼들지 못하고 달아나 버리니, 짓밟히고 찔려죽는 것은 장졸들뿐이었다. 화공과 수공 지략으로 10만 대군을 물리친 공명은 모든 배를 불태우도록 명한 후 유비일행과 함께 [번성]으로 향했다. 

   

허저(許褚) / 조인(曹仁) / 조홍(趙弘)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노발대발하며 유비군을 단숨에 짓뭉개려고 했으나, 유엽이 나서 간곡히 만류했다. 조조는 유엽의 제안대로 서서를 사자로 보내 유비에게 항복토록 했다. 


조조의 명을 받은 서서는 [번성]으로 들어가 유비와 공명을 만나 옛정을 나눈 후, 조조의 사자로서가 아닌 진심으로 유비를 걱정하며 용건을 말했다. 서서는 유비에게 공명을 옆에 두고 반드시 대업을 이루도록 당부한 후 물러나와 [허도]로 돌아갔다.  



☐  패주(敗走)의 길     


[신야]로 돌아간 서서유비가 항복의 권고를 거절했다고 전하자, 조조는 즉시 군사를 휘몰아 [번성]으로 향했다. [번성]의 유비공명의 의견에 따라 백성들을 이끌고 다시 [양양]으로 퇴각하기로 했다. 유비는 [양양]에 이르러 유종을 찾으며 성문을 열게 했으나, 채모장윤이 군사들에게 활을 쏘도록 했다. 


이때 한 장수가 채모장윤을 꾸짖으며 수문장을 죽인 후 성문을 열었으나, 유비는 내키지 않는 듯 [양양]을 포기하고 [강릉]으로 향했다. 유비를 따라 나선 백성들은 병들고 나약한 아녀자들이 많아 하루 10리 길을 가기 힘든 지경이었다. 


공명과 장수들은 잠시 백성을 버려두고 먼저 [강릉]으로 들어가 계책을 세우자고 했으나, 유비는 눈물을 흘리며 그 권유를 뿌리쳤다. 이무렵 유비를 뒤쫓고 있던 조조의 중군은 [번성]에 머물며 [양양]에 있는 유종을 불렀다. 유종이 두려움에 움직이려 하지 않자, 채모장윤과 함께 [번성]으로 달려가 조조를 만났다. 

   

채모(蔡瑁) / 장윤(張潤)

조조는 수전(水戰)에 익숙한 채모와 장윤을 수군 대도독과 부도독으로 삼은 후, 유종을 [형주]의 주인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전해들은 유종과 채부인은 다음날 번성으로 들어가 조조를 만났으나, 조조는 유종에게 [청주]자사의 벼슬을 내리고 즉시 [청주]로 떠나게 했다. 


유종은 고향에 머물게 해 달라며 거듭된 애원을 했으나 냉담한 조조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유종이 [청주]로 떠나자, 조조는 몰래 우금을 불러 이들 모자를 베어 버리도록 명했다. 조조는 다시 [융중] 방면에 공명의 아내와 가솔들을 찾도록 했으나 조조를 헤아렸던 공명은 이미 가솔들을 숨기고 있었기에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어느 날, 군사가 달려와 유비가 백성과 함께 이동하느라 [양양]에서 3백리 밖에 못 갔다고 전하자, 조조는 날랜 군사를 뽑아 하룻밤사이에 유비를 따라잡도록 하고 자신도 뒤를 따랐다. 한편 유비는 3천 군사를 이끌고 [양양]을 떠난 지 열흘이 지났지만, 뒤따르는 10만의 남녀노소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할 수 없었다. 


조조(曹操)

유기에게 원군을 청하기 위해 공명을 [강하]로 보낸 유비가 [당양]에 진을 치고 있을 때쯤 2천여의 조조 정병이 쳐들어왔다. 장비가 나와 혈로를 열어 길을 터주자,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달려온 유비와 그를 따라온 군사는 불과 1백여 기에 불과했다. 


이때 조조군을 맞아 좌충우돌하며 적을 무찌르던 조운은 날이 밝아오면서 유비와 그 가솔들마저 보이지 않자, 죽기를 작정하고 적진 속을 뚫고 들어가 가솔들을 찾아 헤맸다. 


[장판교]로 달려 나간 조운은 가솔들이 남쪽으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나아가 백성들의 무리 속에서 감부인을 만날 수 있었으나, 미부인과 유비의 친자인 아두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때쯤 한 무리의 조조군이 돌진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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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코에이(Koei) 삼국지 (위 이미지는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편 다시보기  https://brunch.co.kr/@jangkm2000#magaz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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